똑똑. 열등감에서 나오세요
오늘은 저에게 특별한 '동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인생에 가장 길게 '라이벌'이었고 지금도 '라이벌'이고 왠지 앞으로도 '라이벌'일 것 같은 동료입니다. 이 친구로 인해 저의 열등감도 보았고, 좁은 자아도 보았고, 더불어 큰 자극을 받아 치열하게 성장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속마음을 들킬까 봐 그동안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라 망설여지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가 고민하고 있을 '열등감'이라는 지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영업 업무를 해오면서 이 특별한 '동료'와의 인연은 오랜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분은 제가 입사한 이후 6개월 뒤에 같은 팀에 제 직속 후배로 들어왔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2살 많았지만 (군대를 갔다 왔으므로 입사가 저보다 늦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나이보다는 입사 시기에 따라 같은 직급이라도 선후배가 명확했습니다. 6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신입사원 공채 채용 시기에 따라 조직 내에서는 명확하게 선후배를 가르고 그에 맞는 업무를 할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한번 언급했었는데, 그 당시 조직 문화상 저는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 선배들이 하던 해외 영업 업무를 할당받지 못하고, 서무직이 하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문 가져오는 일, 커피 타는 일 등 포함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 후배가 들어오자 팀장님은 바로 해외 영업 업무를 내리셨고,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팀장님을 들이받고, 실장님에게까지 용기백배 부당함을 호소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팀장님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저에게도 선배들이 하던 일을 나누어 주셨지만, 모두 짐작하시다시피 소소한 보복은 끊임없이 이어졌죠. 그분은 얼마 못가 옷을 벗으셨지만, 그때 집요하게 그 후배와 저를 저울질하며 저의 자존감에 낸 '스크래치'를 생각하면, 아직도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업무 역량으로 비교한 것이 아니라 정말 단순 방정식 '여자가 무슨 해외영업이야. 감히.' 이런 선입견과 편견으로 저를 대하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제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동물이 '인간'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스스로 그 '트라우마'를 떨치기 위해 저는 부단히 도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지지하는 가족,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나는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라고 수없이 되뇌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 못된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사람에 의해 저울질당하고 평가받는 것에 무뎌지려고 마음을 단단히 훈련시켰던 것도 같습니다.
더불어 그 훈련 중에 하나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그 후배를 마음에서 멀리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으려 했던 것도 있습니다. '너는 그저 남자라는 이유로 인정을 받는 것뿐이다.' 유치하리만큼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저 회피하는 방법으로 그 후배를 대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후배는 객관적으로 보면 역량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언어 전공자로서 몇 개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거침없는 돌파력/추진력, 궂은일을 나서서 하는 적극성으로 그 시대의 해외영업 '형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했습니다. 더욱이 '충성', '단결'을 입에 달고 살며, 군대 문화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회사원이었습니다.
그의 방식이 저는 좀 많이 거슬리고, 익숙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잘못되었다고 정의 내리며 '다른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역시나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저는 그와 멀찌감치 떨어져 '다른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항상 화려한 조명 아래 그가 반짝반짝 빛날 때마다, 저는 언제나 모른 척 수행하는 자의 마음으로 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행히도 그분과 저는 다른 각도에서 인정받았고, 둘 다 큰 무리 없이 직장 내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의 방식은 나에게 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 뿐, 틀린 방식은 아니었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 일찍 틀렸다고 정의 내린 제 자신이 좀 부끄럽기도 합니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한번쯤 해본다면 전에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10년 넘게 곁에서 엎치락 뒤치락 같이 해외 영업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다른 성향으로 인해 쿵작이 잘 맞는 직장 동료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방식이 맘에 안 들어 절대 같은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으며, 절묘하게 업무적으로 엮이지 않게 요리조리 서로 잘 피하면서, 혹여나 업무 협조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극존칭을 하며 서로에게 극도로 조심스럽게 예의를 차려 행동했습니다.
지금도 그는 제 뒷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주재원 신분인데, 한날한시에 그분과 같이 발령을 받아 같은 지역으로 주재원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주재원 나오기 전 회식자리에서 '우리는 정말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이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저는 개인적으로 덜 행복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나에게 주재원이라는 행운이 오긴 왔는데, 반절만 왔구나. 신은 나를 또 한 번 시험하시려는구나.'
주재원 생활 2년이 지나가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그래도 이전보다는 협업하며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가 갖지 못한 세밀한 부분을 제가 채우고, 제가 조금 망설일 때 그는 주저 없이 치고 나가는 역할을 하며 말하지는 않지만 서로 보완제가 되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분기 실적이 성공적으로 마감되어 갖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배, 예전에 우리가 어렸을 때 선배가 저한테 '6개월 차이밖에 안 나니까 선배라고 안 불러도 돼요'라고 하면서 이름을 부르라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었어요. 기억나세요? 왜 그랬는지 알아요? 나는 내가 나이가 많아도 내가 말을 놓거나 이름을 부르면 다른 후배들까지도 선배를 막 대할까 봐 그게 싫어서 그랬어요. 가끔 저도 선배가 왜 이렇게 까지 독하게 하나 이해가 안 됐는데.... 돌이켜 보면 선배는 선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 요즘에 와서 그걸 느껴요. 내가 그동안 잘 못해준 것 같은데, 앞으로 선배가 어디에 있든 잘되게 내가 도와줄게요."
그는 나의 오래된 라이벌로 나는 그를 좋은 동료로 인정한 적도 없었고, 그도 나를 이해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하는 동료도 아니었고, 서로가 원하는 바대로 변해주길 기대하지도 않는 그런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늘 있는 것처럼 누적된 서운한 감정들이 있었고, 타인이라는 이유로 깊게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직장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계의 줄타기를 꾀나 조심스럽게 잘 탔던 것 같습니다. 돌연, 그의 말을 듣고 그동안의 서운한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가졌던 혹독했던 감정이 전보다는 살짝 너그러워진 내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전에 그가 저에게 줬던 '열등감'에서 비로소 웃으며 걸어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선물로 준 것 같았습니다.
하늘은 나를 성장시키려고 마음먹으면 라이벌을 한 명 보내줘요. 나보다 더 능력 있어 보이고 배경도 좋고 심지어 성격까지 좋은 라이벌을 보내 내 안의 잠재력과 노력의 열정을 불태우도록 종용합니다. 경쟁할 때는 그 사람이 참 밉고 싫지만 세월이 지나 내가 이만큼 성장한 것을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라이벌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혜민.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