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무릅쓰다
원하는 것을 얻는 다양한 방법 중 가장 빠르고 쉬운 것, 바로 질문이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양한 형태의 질문을 하며 그 특권을 누린다. 모바일 검색창으로 조합하는 키워드들도 조용한 질문의 한 형태이며, 답을 얻고 싶어 책을 뒤적거리는 나의 행동도 움직이는 질문의 한 형태일 것이다. 질문은 낯선 곳에서 목적지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돕고, 한 사람의 생에 대해 빠르게 배우게 하며 나라는 사람의 심오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인도한다. 질문은 힘이 세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오늘의 문장으로 깨달은 귀한 사실은 바로 이 질문이 이 시대에 태어난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권한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생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무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내게는 마음 편히 질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질문을 품을 자유가 있으며 질문하는 만큼 성장하는 가치가 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는 질문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문화에서 자랐지만, 질문을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인지 확신했을 때, 우선 하고 보는 급한 성향인 때문인 듯하다. 더불어 약간의 저릿한 긴장감이 순간의 성장을 이끄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을 때가 많다.
14살, 광우병 시위로 신문사가 난리일 때 나는 사회선생님에게 신문에 보도되는 것은 사실인지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 또한 사람의 견해라고 대답해 주셨고 그때부터 신문사마다 다른 타이틀을 이해하게 되었다. 국어 시간, 시를 해석할 자유를 앗아가고 정답만 강요하는 선생님에게 우리의 각기 다른 시선은 다른 것이 아니고 틀린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어쩌면 되바라진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순수함으로 포장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듯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손을 들고 물은 질문 속에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었고 질문에 대한 소득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경험들이 쌓이면서 질문이라는 것의 두려움이 마음 저변에서 사라진 것 같다.
물론 질문으로 좋지 않은 경험을 겪기도 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매점에 다녀온 친구가 정확한 거스름돈 500원이 아닌 100원만 받아온 적이 있다. 14살짜리가 조막만한 손을 꽉 쥐고 속상해하자 나는 그 손을 잡고 다시 주인에게 바로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우기지 말라는 것이었고 나의 계속된 질문에 그녀는 도둑년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야 말았다. 나는 여전히 500원이 아닌 100원짜리 동전을 꼭 쥐고 있는 현실과 용기에 모욕만 더해진 것이 서글펐다. 순식간에 구경거리가 되면서 그동안과는 확연히 다른 기분 나쁜 긴장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처음으로 상대에 따라 질문의 대가가 가혹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배운 듯하다. 그러나 주변의 눈초리와 부정적인 경험으로 멈추기에 질문은 여전히 나에게 참 매력적인 행위였다.
나는 질문이 빛을 발하는 여러 가지 순간들을 좋아한다. 특히 질문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도 하는데, 가장 큰 예가 바로 나 자신을 향할 때이다. 나라는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익숙한 것이 나 자신이지만, 질문을 하는 순간 스스로와의 거리감이 생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꼭 필요하다는데,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식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그 공간이 나를 숨 쉬게도 하고, 성장하게도 해서 '성찰'이라는 단어로 정의하며 그 행위를 즐긴다. 나는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허락됨에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질문은 낯선 공간 낯선 사람과 있을 때에도 요긴하게 쓰인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검색으로도 한계가 있을 때, 혹은 여유가 없거나 그냥 여러 방법들 중 가장 쉬운 것이 질문일 때, 나는 그냥 묻고 원하는 것을 얻는다. 이러한 나의 행동이 딱히 대담하다거나 별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주체가 평소에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상황이 달라지나 보다. 별 스스럼없이 질문이라는 것을 하는 나를 보면 함께 있는 사람들은 조금 놀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향과 별개로 나의 질문이 순수한 의도와 무모함의 경계선을 아슬아슬 넘어 다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질문의 범위와 다치지 않게 질문하는 방법 그리고 내용의 질을 높이는 법 등을 터득하려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이것이 나의 질문이라는 행동의 출발점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부끄럽지 않다.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고, 어떤 방면으로는 모두가 나보다 더 많이 안다. 나는 질문으로 한 사람이 오랜 시간 터득한 것을 짧은 시간으로 얻을 수 있고, 오래 지켜봐야 알 수 있는 사람을 빠르게 파악할 수도 있다. 애매하고 모호한 것들이 질문을 하는 순간 내 경험이 되어 손에 잡힌다.
질문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다. 그렇다면 나를 알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질문이지 않을까. 수많은 기억들이 쌓이고, 수없이 바뀌는 상황 속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에게 질문은 성장하기 위해 배워야만 하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질문하는 삶과 하지 않는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간극이 커질 것이다. 나에게 질문하고 사유하는 사람이어야 결국은 그 시선이 타인에게로도 바르게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눈치를 많이 보는 사회와 문화 속에 있지만,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삼키지 않으려 한다. 오늘의 문장처럼 그 특권과 축복을 계속해서 누릴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여러 번 계속하면서 근본적인 원인이 노출되고 답답했던 실타래가 풀리는 경험 또한 쌓아가고 싶다.
과거에 질문은 위에서부터 내려와 하문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으나, 이제는 나이 권력 등 사람을 둘러싼 껍데기를 막론하고 할 수 있는 형태로 변했다. 심지어 챗GPT라는 간편한 질문의 대상도 하루가 다르게 거듭나고 있으니 질문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제는 질문에 대한 프레임을 다시금 정돈하고, 더 귀하게 활용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