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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Feb 15. 2020

기생충의 아이러니

오스카 4관왕의 영광


나는 영화를 잘 모른다. 연출의 기법이나, 음악과 연기의 조화나.. 이를테면 미쟝셴 같은 말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나에게 영화를 형식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지식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영화와 현실을 늘 겹쳐서 감상하곤 한다. 가령, 어벤져스를 볼 때면 저 무너지는 건물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의 삶을 떠올려 본다던가.


기생충은 내내 웃을 수 없는 영화였다. 나는 영화의 모든 현실에 있었다. 반지하방에 사는 친구의 아버지는 외국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였다는 점을 빼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대로 그 으리으리한 저택의 부잣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동네는 그랬다. 반지하와, 고층의 값비싼 아파트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만 했다.


영화 내내, 나는 돈을 벌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부수적인 것들을 거품처럼 끓어오르게 하는지 느꼈다. '계획이 있는 삶' 같은 모습과, 빈곤 지하의 빈곤, 제목은 이 모든 것을 완성시켰다고 느꼈다. 숙주를 죽이는 기생충의 모습과, 사실은 숙주 역시 빈곤을 밟고 살아있다는 점에서, 그의 삶의 많은 것들이 그 빈곤한 자들의 손 끝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참으로 비참했고, 태연히 보기 힘들었다.


이 영화가 오스카 4관왕을 수상했을 때,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영화가 예술로서, 혹은 대중영화로서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영화에 녹아든 봉준호감독의 시선이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시선이라고 느꼈다. 그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할 훌륭한 예술가의 일이었으나, 그 시선에 비친 극화된 기생충들의 삶은 너무나 현실적인 삶의 접점들을 보여준다. 그 접점들에 서 있던 이들에게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기억을 자극하며.


대단한 감독의 눈길 끝에서 태어난 영화가 전 지구의 부란 부는 다 누릴 수 있는 미국의 헐리웃 스타들과, 쇼 비지니스 산업의 역군들에게 선택을 받는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구석으로 몰아낸 백인들의 부는 전쟁과 체제승리를 통해 이제 세계의 귀족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문화적, 자본적 힘의 중축을 담당한다. 그런 그들이, 한 아시아인의 '로컬'이라는 발언에 귀족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선택한 것은, 통 큰 '허락'을 통해 그들 세계의 '지하'에 있던 사람을 자신들의 놀이터 끝자락에 앉혀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기뻐했다.


나는 그 영화의 수상이 부정했다거나, 이 영화가 '능력주의'적으로 자격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스카 수상으로 인해 기생충은 기어이 영화와 현실을 콱 쥐고 끌어당겨 완성시켰다는 생각을 했다. 인종과 출신으로 차별받는 아시아의 '빈곤'과 '계급'에 대한 군상극을, 미국의 부유층과 교양있는 예술가들과 '백인'들이 평가하고 상을 준다. 다양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그 누구도 반지하의 냄새는 모를 것 같은 이들이. 마치, 영화에서 이선균이 송강호를 기사로 데려다 쓰는 그것처럼. 이 모양새 자체야말로,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영화에서는 기어코 송강호가 칼을 든다. 그러나 오스카에서는 그 누구도 화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영광스럽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빈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들이 빈곤한 이들의 삶을 아주 잘 만들어 구경거리로 팔았고, 그들은 그저 안락한 좌석에서 샴페인을 든 채로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닌, 저 어딘가의 인형극처럼 즐긴다. 행여나 영화를 보고 느끼는 저릿한 마음 한 켠으로, 빈곤한 이들의 불쌍한 사진에 좋아요나 누르면 다행이다. 물론, 많은 미국의 부호들이 전 세계의 불우한 이들에게 자신의 자산을 기꺼이 나누며 돕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늘 빈곤한 이들은 그들의 유흥거리로 남는다. 영원히, 평등해 질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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