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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면지언니 Sep 13. 2020

마라와 함께 비극을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병과 식탁 [하트홀 공화춘] 프로그램 리뷰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그 시간들을 읽어내는 힘은 예술 작업이 할 수 있는 일들 중 참 값진 일이다.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병과 식탁은 이런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업이었다. 예술가의 예민한 감수성과 연구자의 끈질긴 탐구가 결합하여 주제에 대한 여러 방향의 시선들을 담아냈다. 침착하고 묵묵하게 시대를 읽어낸 작업도, 어쩌면 우리가 이전부터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첨예하게 짚어낸 작업도 있었고, 발칙하고 재기 발랄한 생각으로 사고의 전환을 유도하는 접근들도 있었다. 각 작품들이 하나의 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더 흥미로웠다. 탄탄한 기획의도를 딛고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연구 과정을 거쳐서 각자가 원하는 날개를 달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c)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 병과 식탁



비극의 한 복판에서 만난 작업

하트홀 공화춘

전시장의 작업들을 하나씩 지나쳐 인디아트홀 공의 끝에 마련된 작은 팝업 식당에서 <하트홀 공화춘>의 식사 자리가 시작되었다. 손재린, 임승균, 그리고 임정서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프로젝트는 병과 식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비극을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과 또 다른 가설들을 펼쳐놓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시간의 한 복판에서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그리고 ‘병과 식탁’이라니. 게다가 비극을 이야기하며 마라탕을 먹는다고! 작업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읽을 필요도 없이 하트홀 공화춘을 선택했고, 가까스로 마지막 티켓을 얻었다.


(c)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 병과 식탁


식당으로 규정한 공간에 들어온 이들은 손 소독을 하고, 커다란 테이블에 함께 앉아 마라탕을 먹을 준비를 한다. 관객에게 주어진 미션은 간단하고, 적당한 개입을 요구하며 개인의 이야기들을 강요하지 않았다. 앞에 놓인 (언)포춘 쿠키를 열고 주어진 희곡을 읽은 뒤, 내가 만약 이 이야기에 개입한다면 어떻게 비극을 막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었다. 고민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 일들을 잘 수행해내야 마라탕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조급함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능숙하게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비극을 굳이 꺼내어 놓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리고 주어진 희곡에 비추어 누군가의 비극을 마음대로 바꿔내는 시간은 마라탕의 애피타이저로 적절했다. 거장들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난도질하도록 허락된 이 자리는 비밀스러운 쾌감을 주기도 했다. 피상적으로나마 그 비극들을 맛과 향으로 마주하며, 그제야 이 행위들이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어쩌면 ‘공연’, ‘연극’이라고 불리는 정형화된 작업들과 ‘퍼포먼스’라는 행위는 닮고도 다르다. ‘퍼포먼스’에서는 누가 주인공이 되는지에 집중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그 과정의 수행자가 되는 경험이 설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희곡에서 비극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삶에서는 비극이 없다고 규정하는 순간 비극의 칼날들이 삶으로 돌아오지만, 희곡에서 만큼은 무심한 방관자로 존재하는 것이 용납되기 때문일까.


(c)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 병과 식탁


느슨하고도 정중한 방식으로 참가자들에게 개입할 것을 요청한 퍼포먼스였다. 참가자들은 이것이 희곡이고 이 자리가 설정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은 채 이야기에 몰입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남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동적인 관객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생각을 털어놓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자리는 ‘병과 식탁’이 기획의도에서 밝힌 ‘친근함, 교류의 행위이자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행위’라는 말과 맞닿아 있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들이 작업의 일부가 되어 식탁을 매개로 서로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엮어 냈다. 우리는 자신이 고른 답에 따라 마라탕의 맛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점차 내가 고른 답이 무슨 맛일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 맛을 선택했는지 외부로부터 해석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창작자들은 그들의 주관적인 해석과 설정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열어두었다. 그러려니 하고 이어진 식사의 자리에서 어떤 이들은 맛에 대해 투덜대고, 어떤 이들은 만족해했다. 모든 것을 설명해낸다면 자칫 점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도리어 모든 선택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 열린 구조는 영리하게도 참가자 각자의 선택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두었다. 이들이 설정한 참여자들과 작업 간의 적당한 거리, 그리고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느슨한 공동체는 도리어 참여자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매운맛, 달콤한 맛, 쓴 맛

왜 마라탕을 택했을까


왜 마라탕을 택했을까. 인생이라는 비극의 매운맛을 상징하려고 했거나,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는 이유로 매운맛이라는 자극을 선택했을 수도 있겠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 맛을 통해 자신의 비극이 어떤 맛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심리가 만들어진 점은 흥미로웠다. 비극을 보며 느끼는 고통의 감정, 어쩌면 그 비극의 결말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엉뚱한 가정, 고전의 구성을 깬다는 금기로부터의 희열들이 뒤엉켜 마음이 복잡했다. 복잡한 마음을 즐기며 내가 받은 마라탕은 제법 맛있었고, 온갖 맛들이 섞이고 조화를 이루는 요리인 마라탕은 비극과 잘 어울렸다.

(c)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 병과 식탁

실은 식탁에 앉아 함께 저마다의 마라탕을 먹으며, 이 식사의 자리가 어쩌면 최후의 만찬으로 기록될지 모른다는 무서운 상상을 했다. 전염병이 점점 더 심해지고, 당장 다음 날 모든 것이 멈추어버릴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 매운 마라탕을 먹었다. 작품이 관객들을 만난다는 것은 시대와 시기라는 배경에 뒤엉켜서 의도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하곤 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공동 창작자 중 한 명이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협업을 했다는 점이었다. 한국과 미국, 물리적 거리와 시차를 넘어 이들이 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극을 전공하여 작업을 시작한 뒤 수많은 희곡들을 마주하고 다루어냈을 연출가 손재린과 그런 손재린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을 작가 임승균, 그 둘을 매개하며 서로의 생각과 발상을 섞고 엮어낸 기획자 임정서의 화학적 만남이 문득 궁금해졌다. 창작의 정량적인 측면에서 서로 얼마만큼의 기여를 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들이 어떤 질문들을 찾아냈는지, 그 질문에 답을 향해가는 과정은 어떠했을지, 작업을 통해 어떤 가치들을 다뤄내 보고자 했는지가 궁금했다.


기획자는 창작자가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 그 언어들의 뒤에 어떤 질문이 깔려 있는지를 이해하고, 이를 작업으로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중재하면서 적당한 장을 마련해내야 한다. 관객으로 작업에 참여하며 이들이 수행했던 대화와 협업의 과정이 이러한 일들을 찾아내는 흥미로운 발견의 과정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손재린이 없음에도 손재린이 보이는 것 같은 작업이었다.


기획 단계에서의 치밀한 설계는 때로 어긋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치밀한 설계를 언제든지 허물고 다시 재구성하려는 용기도 필요하다. ‘병과 식탁’에서 보여준 다양한 작업의 주제와 표현의 방식은 이 프로젝트의 기획이 유연성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 주제와의 연결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러 질문들이 머리를 맴돈다. 불안과 공포를 마주할 준비는 과연 가능할까. 모든 질병들에 대비책을 마련해둘 수 없다면 우리는 닥친 상황들에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할까. 과연 우리는 삶의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 재간이 있는가.


좋은 질문들을 하게 하는 작업은 언제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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