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획자의 거리예술 이야기
비로소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공연 직전까지 골목에 짐을 놓아두셨던 사장님들은 마지못해 짐을 옮겨주셨다. 제현이 큰 짐을 뒤로 메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시더니 마음이 동하신 모양이다. 그리고는 우리 지게를 구경하신다. 꽤 잘 만들었다며, 다만 지게 지는 연습을 좀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짐을 잔뜩 지고 있는 제현이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음악을 틀며 틈바구니로 제현을 본다. 허물어져가는 을지로의 뒤편에는 멀리 높은 건물이 가득하다. 공연을 준비하며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하는 을지로를 지켜봤고 그 모습들을 그대로 공연에 담고자 했다. 을지로의 골목 멀리서부터 공연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대림상가의 난간에서 첫 장면을 바라본다. 점처럼 작게 보이던 지게꾼 제현이 점점 앞으로 다가오고, 모여든 관객들을 서서히 아래로 안내했다.
"[지게·꾼]은 지게와 짐 그리고 어디론가 멀어지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도심 한가운데 나타난 그들은 분명 있었던 것들을 여전히 기억한 채, 어쩌면 여전하지 않을 것들을 등 뒤에 이고 어딘가로 향한다. 작품은 관객들과 함께 도시의 구석을 살피며, 종착지가 어디인지 묻기에 앞서 여정을 함께 하기를 권한다."
무너져 내린 제현의 짐은 무언가를 잔뜩 꾸리고 있다. 짐 더미의 뱃속 깊은 곳에서 꾸물대듯 소리가 흘러나온다. 짐에 달린 작은 문을 열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옷가지들을 끄집어낸다. 줄줄이 매달린 옷들이 관객들 사이를 금세 가로지른다. 제현은 그 옷들을 기억하는 것 같다. 함께 느린 춤을 추듯 옷가지들을 하나씩, 둘씩 보듬어 내고는 이내 스러진 짐 더미를 누군가의 옷으로 부둥켜안는다.
우리는 을지로를 높은 곳에서 잠시 바라보고, 스러진 짐들과 내장처럼 비집고 나온 누군가의 옷들을 마주하고, 이내 꼬불꼬불한 을지로의 골목으로 파고들어 갔다.
은혜전기 앞 골목에는 어쩐지 유난한 색깔로 가득한 보따리 더미가 놓여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단 보따리 더미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달팽이처럼 보따리를 이고, 보따리에 기대 있던 민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짐에 가리워서 무엇을 보는지, 살피는지 드러나지 않지만 민지는 어딘가를 더듬어 찾고 있다. 짐들 탓에 위태로운 것인지, 위태로운 민지를 짐들이 붙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민지의 몸 같던 짐들이 하나씩 민지에게서 떨궈진다. 민지는 바닥에 쓰인 글씨들을 천천히 발견하고는 보따리를 하나씩, 둘씩 그 자리에 놓아둔다.
민지가 짐을 놓아둔 골목을 따라가니 이내 다른 길이 나온다. 민지와 제현이 그곳에 함께 서있다. 이들은 규칙과 변칙을 만들어내며, 서로에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몸을 척도 삼아 공간을 가늠하고, 작은 골목을 오가며 보이지 않는 공간을 몸으로 시각화한다. 서로의 몸을 지게 삼아 기대며 무게를 나눠진다. 기대어 움직이다가도 반향의 힘으로 전환하며 각자의 균형을 찾는다. 이들의 균형은 금세 다른 속도의 움직임으로 변화하며 점차 고조되고, 이내 다음 골목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민지와 제현이 사라진 골목, 누군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리 빛과 소리, 그리고 공간이 있다. 문이 닫힌 을지로의 가게들 사이사이에서 누군가의 소리들이 스며 나온다. 어느 가게 앞의 라디오 소리. 무심히, 그렇지만 부지런히도 일하는 기계들의 소리. 을지로 어딘가의 소리인 것 같은데, 이곳에는 사람이 없다. 비로소 공간 구석구석을 살피게 되었다면 공연이 준비한 모든 것을 알차게 즐긴 관객일 테다. 누군가 놓아두었을 아담한 화분에도 작은 조명을 걸어두었고, 어느 가게 앞 셔터에 적힌 낙서에도 눈길을 주었다.
작은 불빛이 비추고 있는 골목 끝의 기계 위에는 제현의 짐들이 작은 짐 더미가 되어 쌓여 있다. 길의 제일 끝쪽에서 나지막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에디뜨 피아프의 'Je Ne Regrette Rien'다. 이곳에 있었을 누군가의 삶, 낭만, 그리고 신기루처럼 지나간 시간들이 이 노래에 담기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노랫말과 함께 잠시 신기루 같았던 골목을 뒤로하고 마지막 길을 향해 걸어 나온다.
지게 위에는 민지가 우두커니 서있다. 제현은 민지를 지고 느리게 큰길을 향해 걸어간다. 눈으로, 시선으로 을지로를 담아내고 관객들에게 함께 이 골목을 보기를 권한다. 차들이 오고 가는 큰길의 앞에 지게를 놓아두고 민지와 제현은 사라진다. 관객들은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을지로의 지게를 보며 마지막 골목에 잠시 머문다. 우리가 뭐 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는 행인들이 문득 지나가다가 골목에 멈춰 서서 가만히 머무르고 있는 관객들을 구경한다. 행인들에게는 어느 좁은 골목에 오밀조밀 모여서 작은 지게 하나를 응시하고 있는 관객들이 제법 신기했겠지. 공연이 끝났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우리가 만난 지게꾼, 우리가 만난 을지로를 이야기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골목을 오가시던 사장님들이 생각난다. 뭐하냐고 말도 붙이시고, 우리의 짐과 지게를 보며 훈수도 좀 두시곤 했다. 우리는 뭐 대단한 일을 한답시고 감히 그분들의 공간을 잠시 빌려 썼다. 우리가 스치고 지나간 골목은 다시 일상의 자리가 되었겠지.
"골목을 누비며 여전히 생동하는 삶의 흔적들을 마주했다.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사라지고 세워지는 모든 것들의 중간에서 [지게・꾼]은 을지로가 못다 한 이야기들을 지게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작업을 하는 동안 을지로는 빠르게 변해갔다. 며칠 전까지 있던 공간들이 없어졌고, 분명 길이었던 곳에 벽이 생겼다. 지게꾼의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과정도 비슷했다. 지게 위에 짐을 쌓아보겠다고 부단히도 노력하고 무너졌던 창작의 과정은 힘들었지만, 어느덧 제현과 민지는 진짜 지게꾼을 닮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짐을 쌓아 올렸고, 그 짐에서 이야기들을 꺼내며, 짐들을 통해 이야기들을 바라보며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기댈 곳 없는 이들, 기댈 곳 없는 장소와 시간들을 지게에 잠시 얹었다.
거리예술 공연을 하고 나면 공연을 했던 이전의 장소들이 아는 공간, 알던 공간, 함께 했던 공간이 된다. 혼자 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골목의 새로운 모습들이 보이고, 빠른 속도로 지나갈 때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린다.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나도 시선을 옮겨가게 되고, 이 도시의 옛 시간과 지금, 그리고 다가올 시간이 뒤엉킨 모습이 하나의 장면으로 기록된다. 도시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늘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공연이, 예술이, 만남이 새로운 시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나의 일이다. 어쩌면 거리예술은 들려주려고 했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관객과 창작자가 함께 공간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에 더 가까운 일인지 모른다.
지게꾼을 잘 보내드리기 위해 머릿속의 장면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풀어본다. 야속한 코로나가 유난히 지게꾼에게는 더 가혹했던터라, 제법 오래 준비해오던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을지로+2°C 덕분에 비로소 2년만에 관객을 만났다. 을지로의 구석구석을 함께 걷고 공간, 소리, 사람을 발견하며 지게꾼의 여정이 더 깊어졌다. 이제 지게, 지게꾼을 보내드릴 시간. 고마웠어요. 고생 많았어요. 함께 꾸린 봇짐에 담긴 이야기들이 앞으로 어디선가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지게・꾼
2022.3.26(토), 27(일) 18:20
을지로 대림상가 일대
제작: 아이모멘트
공동창작: 강민지, 곽소민, 노제현, 임현진
공공예술프로젝트 [도시, 을지로 + 2°C] 참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