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혜 사진전 <보편적인 너> 기고글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장은혜, 나를 오랫동안 보아왔던 은혜 언니의 피사체가 되어 적지 않은 시간을 공유하고 사진을 핑계 삼아 제법 긴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는 이 이야기를 '보편적인 너'라는 타이틀의 전시로 풀어냈다. 마음 속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어떤 순간의 마일스톤을 찍어낸 느낌이다.
어린시절, 좋아하던 소설은 ‘빨간 머리 앤’ 시리즈였다. 정확하게는 ‘ANNE’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는 ‘빨간 머리 앤’을 포함한 다섯 권의 책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한 아이가 에이번리라는 마을의 마릴라와 매튜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과, 여성으로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상과 묘사가 가득한 그 책에는 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시선이 담겨 있는데, 미처 삶을 잘 알지 못했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 앤의 모습을 보며 제법 나를 투영하고 공감하곤 했다.
제일 많이 읽었던 것은 앤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이 그려져 있었던 1권과 2권이었는데, 현명하고 발랄한 앤이 마주하는 세상들이 참 신나고 즐거웠다. 그런데 3권 이후로 가면서 어쩐지 우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앤은 성인이 되어 길버트와 결혼한 뒤 아이를 낳고, 이내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어쩐지 나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앤에 대한 애정으로 읽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삶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어린 시절의 모습과는 달리 삶의 여러 변곡점을 받아들여야 하는 앤. 물론 여전히 세상을 상상력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여전히 아름다움과 사랑을 꿈꾸지만 어른이 된 앤의 모습은 왠지 낯설었다. 그 낯선 느낌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른이 되면 모두 그런걸까.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는 도덕 혹은 윤리 과목을 가르쳤고, 종종 선생님들의 리더 격인 부장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시간을 쪼개 대학원을 다니며 상담을 공부하기도 했다. 엄마가 교과서를 쓰던 때도 있었는데 그 시절엔 엄마의 컴퓨터가 늘 새벽까지 환하게 밝혀져 있던 것이 생각난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 학교라는 엄마의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엄마는 가르치고 상담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일의 전문가였다. 한편으로는 그런 엄마를 일에 뺏겨버린 것 같아서 속상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엄마가 일하느라 집에 없는 것이 싫어서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평범한 회사원과 결혼해서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일하느라 바쁜 엄마에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내심 엄마 이야기를 하면 늘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나에게 강인한 존재였다. 일하는 여성,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놓은 여성, 그리고 그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여성이었다. 그런 엄마의 뒷 모습에 가족을 지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 단순하고도 아이러니했다. 엄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과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엄마처럼 어른이 된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
나는 행복한가. 사실 나는 삶에 대해 길게 바라보고, 철저하게 계획하고 하는 일들을 잘 해내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지 눈 앞에 닥쳐야 가까스로 해내기에 급급했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덤벼들곤 했다. 무엇이 내게 행복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나이를 한참 먹은 지금도 여전히 하루살이처럼 산다. 하지만 평균 정도로 이야기한다면 행복한 것 같다. 사랑하기를, 사랑에 빠지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탐험하는 것이 즐겁다. 이십대에는 이런 내가 불안하게 느껴지고, 정확하게 무얼 원하는지를 모르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다. 미성숙에 대한 착각은 나를 종종 괴롭혔다. 표준과 규범, 나이와 성별에 맞는 삶에서 내가 어긋나 있다고 느낄 때마다 두려웠다. 좋아하는 대로 살면 안되는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이 종종 다르곤 했는데, 나는 이기적이게도 늘 내가 원하는 삶을 택했다. 좋은 선택이었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았을 때도 있었지만 다행이었던 것은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 선택한 적이 없었다는 것. 우왕좌왕하며 살았음에도 후회를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은 큰 풍파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삼십대가 되고 나니 조금은 나의 나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마흔 살은 어떨까. 쉰 살의 나는 어떨까. 예순 살이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누군가를 오롯이 짊어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두렵지만, 여전히 모두를 사랑하고 싶은 나. 나는 그때도 지금과 같을까. 여전히 나다운 삶을 살고 있을까. 어쩌면 외로워하고 있을까. 어쩌면 후회하고 있을까.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랑한 할머니가 되는 것.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흘러도 딱딱하고 차가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생각도 말랑하고 유연한 할머니가 되는 것. 그때에 할 수 있는 재미난 일들을 여전히 찾아 탐험하고, 여전히 허둥대지만 어쩐지 여유가 있는 그런 할머니가 되는 것. ‘할머니가 되어도 이렇게 좋단다 얘들아’ 하고 이야기를 건낼 수 있는 멋진 할머니 선배가 되는 것.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런 할머니가 되는 것.
2022년 9월 면지
장은혜 개인전 #보편적인너
우리는 흔히 적령기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삶을 보편적이라고 한다. 다만 작가 장은혜가 카메라에 담은 두 명의 인물은 위에 언급한 보편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보통 비혼이라 부르는, 그러나 그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지난 몇 개월 간 작가 장은혜는 두 인물과 대화하고,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지켜보았다. 카메라를 도구로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담아낸 개인전 <보편적인 너>는 ‘보편적’이라는 말의 정의대로 사는 삶이 정말 보편적인 걸까 질문한다. ‘보편적인 너’라는 제목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누군가가 만든 보편적이라는 프레임을 거두고 두 인물의 모습을 담담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전시와 더불어 각 인물이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업물도 함께 선보인다.
10.12(수) 15-18시
10.13(목)-15(토) 10-18시
과천시민회관 갤러리 아라
경기도 과천시 통영로 5
bit.ly/ordinary_you
instagram.com/takeaday_exhib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