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면지언니 Dec 08. 2022

축제, 축제 기획, 축제 기획자

<축제 기획자/관계자로서의 나> 자문화 기술지 기고글 (주관: 알프스)

1. [현재] 현재 하는 페스티벌은 무엇인가?


포항거리예술축제(Pohang Street Arts Festival)은 경상북도의 지방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거리예술’을 테마로 하는 공연예술축제로, 포항문화재단의 주최 하에 2018년 처음 시작되었다. 포항의 송림숲을 거점으로 북구 송도동 일대를 주요 공연 공간으로 삼고 있으며, 첫 해 개최 이후 매년 공모와 기획의 방식으로 국내외 거리예술 작품을 구성하여 포항의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거리예술의 경향을 포항의 시민들에게 소개하면서, 연중 거리예술이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는 공공공간예술의 특성에 대해 고민하는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중소규모의 거리예술 작품 제작, 초연 작품에 대한 커미셔닝 등 프로그래밍의 방식을 다각화하기 위한 시도를 지속해오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이 예술의 과정에 관여하고 매개자로 참여할 수 있는 참여형 공연의 비중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


2. [시작] 축제 분야에서의 일은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축제 조직에서의 활동 이전과 이후의 삶의 연속적 흐름 속에서 본다면, 축제인으로서의 나는 언제 시작되었고, 언제 분명한 정체성으로 확립/자각되었는가?


아주 첫 시작을 이야기하자면, 고등학생 시절의 거리극축제 자원봉사자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자원봉사이었기에 전문성을 가지고 일했다거나 직업적인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축제의 한 사이트를 맡아서 인터파크 티켓 관리 시스템과 발권 매뉴얼을 익히고 제법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관객들이 공연장에 입장하는 모습, 큰 책임자라도 된 것처럼 현장에서 안내를 하는 나, 그리고 축제의 공연이 시작된 순간의 환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후에도 수년간 자원활동가로 축제에서 일했다. 해외 아티스트를 픽업하고 현장 의전을 하는 일을 맡기도 했고, 공연장 안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자원활동가와 스태프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만큼 나의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후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IBM이라는 외국계 기업의 컨설팅 부서에서 인턴으로 일을 하다가 정장을 입고 출퇴근 하는 삶에서 큰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여름이면 매년 여행을 떠나 온갖 축제와 공연을 즐기는 시간을 보내왔으니 어쩌면 첫 직장에서 느끼는 당연한 무료함과 막막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턴 기간이 끝나고 평범한 경영학도로 졸업하기를 포기하고 예술학교에 진학했고, 천안함 사태로 축제가 연기되었던 터라 일정이 맞지 않아서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된 한 선배를 대신해서 처음으로 축제에서 스태프로 일을 하게 되었다. 2010년의 하이서울페스티벌이었다. 졸업 후 이렇다할 예술계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자원활동을 하며 아티스트 의전을 해보았다는 것을 내세워 제법 호기롭게 첫 직장에서의 일을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축제는 문제 투성이였다. 축제 조직이 일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계획을 제법 성실하고 촘촘하게 세워도 마찬가지였고, 종종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현장에서는 스스로가 책임자가 되어서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논의사항이 발생했고, 축제의 동료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마치 한 몸을 움직이듯이 함께 매 시간을 꾸려나갔다. 고된 일들이 이어지는데도 즐거웠다. 함께 하는 이들과 공동으로 무언가를 성취해나가는 경험, 그리고 우리의 수고가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 아티스트들이 축제에서 기뻐하는 장면들, 그런 순간들이 축제를 축제답게 만들었다.


해외팀 컴퍼니 매니저로 시작했던 업무가 다음 해에도 이어지며 좀 더 복잡한 단계의 작품 현지화 과정을 맡는 것으로 업무를 확장했고, 같은 축제에서 일했던 마지막 해에는 해외 팀의 초청과 협상 단계를 조율하고 예산 관리부터 로컬 프로덕션 매니지먼트까지 전반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자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이어졌다. 축제 프로그램의 중요한 한 축을 맡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졌고, 기획과 구상 단계에서 페이퍼 워크를 하던 일들이 무대라는 공간에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며 느꼈다. 내 축제구나!


3. [가치/질문] 축제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축제는 플랫폼이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게 하고, 대중들을 일시적인 공동체, 마이크로 커뮤니티로 만든다. 일상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일탈, 경이의 경험이 존재하고, 이전에 알 던 것들과는 다른 경험이 축제에서는 가능하다. 이상적인 축제는 분리와 경계를 넘어 서로를 마주하게 한다. 이상적인 축제는 아고라가 된다. 우리의 지금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고, 삶의 희노애락을 부둥켜 안는다. 도시, 권역, 국가를 가로지르며 예술가-예술-관객-스태프들이 서로를 만난다.


극장과 공연장에서 미처 담아내기 힘든 응축된 힘이 축제의 무대에서는 가능하다. 낯선 풍경들을 비로소 바라보게 하고, 이전에 외면했던 가치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순간들은 종종 축제의 예술가-관객-스태프들을 경이의 순간으로 초대한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본성일수도 있고, 예술적 경험으로부터의 환희일수도 있겠다. 10년 전 축제와 관련한 포럼이 열리면 빈번하게 언급되곤 하던 것은 ‘축제성’이 중요한지, ‘예술성’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상적인 축제는 축제성을 예술적으로, 예술성으로부터 축제성을 끌어내리라 생각한다.



4. [변화/사건] 축제인으로서 살아온 시간 속에서 결정적 사건, 장면, 관계, 경험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왜 나에게 결정적이었나? (명시적으로 축제 조직에서 일한 이후의 시간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됨 / 코로나19 제외)


축제에서 일을 시작한지 4년이 되었을 무렵,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 공연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팀장이라는 일을 맡게 되어 함께 일하는 팀원들도 생겼고, 조직 안에서의 역할과 책임도 커졌다. 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고 두려웠지만,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늘 이겼다. 요령도 없고 딱히 다른 방법도 찾지 못해서 늘 밤이 늦도록 일을 했다.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타는 것은 기본이었고, 자정을 넘기고 택시를 타는 일도 잦았다. 축제를 얼마 남기지 않았던, 해외 아티스트들의 계약과 항공권 구입이 거의 마무리되던 날이었다. 세월호가 침몰되었다. 사무실에서는 계속 뉴스를 틀어두고 일했다. 모두가 그랬듯, 구조했다는 뉴스에 안도했고, 오보였다는 뉴스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오후 5시가 될 무렵 모든 상황이 명확해졌다. 재난, 참사구나. 진짜로 일어난 일이구나.


삶이 멈추었듯 우리 축제도 멈춤을 선택했다. 모든 축제가 그래야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축제는 취소하는 것을 선택했다. 안산, 단원고의 아이들은 축제의 가까운 이웃이었다. 사무실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가장 가까운 학교였고, 안산은 그 아이들을 잃었다. 축제는 긴 시간 준비했던 모든 일들을 빠르게 수습했다. 수십명의 아티스트들에게 전화를 걸어 축제의 취소를 알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다시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사고에 대한 충격과 수많은 시간을 바쳐왔던 축제가 취소되었다는 감각이 뒤엉켜왔다. 이후 매일 아침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을 마치 공동의 장례식장을 향하는 것 같았고, 제 감각을 되찾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수개월이 지나 다시 안산에 축제가 시작된다면, 그 축제는 어떤 모습일까. 축제는 무엇을 이야기하며, 관객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이전에 축제를 준비하면서는 공연을 보러 다니고 아티스트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 축제 프로그램의 중요한 기획 방향을 결정했다면, 세월호 이후에는 그것들을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이웃들을 만났다. 축제가 열리던 광장에서 함께 추모의 나비를 만들었고,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애도의 자리에 가서 한참을 머물렀다. 안산의 이야기를 예술계에 계속해서 전하고자 했고, 무언가를 연결하는 매개가 된 것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만남은 축제의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었다. 슬픔을 가벼이 위로하지 않지만, 슬픔을 외면하지도 않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축제이지만 울어도 괜찮은 자리들이 2015년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 있었다. ‘기쁨과 즐거움; 희락’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품어내는 자리가 축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술과 축제가 존재하는 이유에 주목하게 되었다.


5. [변화/사건] 코로나19의 경험은 축제인으로서의 나에게 무엇이었나?


축제의 부재는 축제의 이유들을 다시 생생하게 살려냈다. 일을 시작한 이래로 축제가 없는 계절들을 처음 마주하면서 축제가 만들어냈던 일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축제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는 것, 축제의 방식과 존재의 이유들을 다양화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취소와 연기를 반복하는 축제들을 보며, 취소의 과정들을 살폈다. 축제가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는 데 다양한 이들의 관여와 기여가 필요하듯, 축제가 취소되는 과정에서도 이들의 관여가 필요했다. 다만 축제의 취소 과정에서 겪었어야 했을 논의와 대안 찾기의 과정은 대부분 생략되었고 순식간에 축제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대부분의 정치인, 의사결정권자가 독점했다. 축제를 위해 일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은 그저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고, 관객과 이웃이라는 축제의 관여자들 역시 논의의 과정에서 당연하게 삭제되었다.


축제의 주인이 여럿이어야 한다는 말을 종종하곤 했는데,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관통하며 멈춘 시간들 동안 축제의 친구들을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축제라는 자리에 더 많은 이들을 초대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고, 멈춰있는 시간이 축제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축제가 누군가를 긴 호흡으로 초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전의 축제에서는 당연한 듯 배제되었던 이들에 대해서 그제서야 감각하기 시작했고, 다양성/포용성/형평성과 같은 단어들이 고민의 방향을 결정했다. 축제의 친구들, 이웃들, 주인들이 여럿이었으면 했다. 축제를 통제하는 힘을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시대로부터, 상황으로부터 반응하는 기획을 담고 싶었다.


축제의 이유가 더욱 또렷해지는 시기였다. 호흡을 고르며 다시 신발 끈을 묶는, 부재로부터 존재의 필요를 감각하고 새로운 동력을 마련하는 시기였다. 물론 축제를 다시 시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부재였지만 관객-대중-사회와 축제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6. [문제/미션] 현재 축제를 통해 무엇을 고민하는가? 고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은 무엇인가?


축제에서 일하는 이들이 건강했으면 한다. 축제라는 놀라운 일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축제가 스태프들을 소모시키지 않고, 도리어 스태프들의 성장과 발전을 돕고, 또 다른 가능성들을 너끈히 열어주기를 바란다. 축제가 안정적이기를 바란다. 다른 사회적 인프라들이 그러하듯, 축제라는 존재가 문화 안전망의 일환으로 도시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기를 바란다. 축제가 보여주는 경이의 순간들이 삶에 필요하다는 주장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축제가 존재했던 시간들이 축적되고, 축제를 통해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삶과 사회와 동행하기를 바란다.


이 모든 이상적인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 축제에서 일하는 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축제의 스태프들이 행복하면 관객들은 그것을 금세 파악한다. 그리고 축제도 행복한 축제가 되기 마련이다. 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각자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의사 결정과 통제의 권한을 나누어 가지는 축제, 축제에 관여한 이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축제를 만들고자 한다. 축제를 중심으로 함께 존재하는 이들이 서로가 생태계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연대하고 서로 돕기를 바랐다. 축제가 지향하는 바를 공유하는 약속문을 만들거나, 축제에 참여한 아티스트들과의 대화 자리를 열어내는 것은 이러한 일의 작은 실천이었다. 더불어서 축제의 성취를 한 인물이 독점하지 않는 것 역시 중요했다. 모두의 성취로 축제 자체를 기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공기관의 수장이 바뀌고, 정책과 지침들이 변경되며 축제가 쉬이 사라지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우리 축제는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축제의 성취가 더 확산되고, 축제의 경험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이런 일들이 우리 축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7. [지속] 내가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축제인으로 살아갈 것 같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축제인으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종종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때면 늘 내가 축제를 좋아하는 이유를 떠올린다. 어쩌면 다른 길을 발견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 길을 축제처럼 만들어 가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더 다양한 분야에서의 축제를 실현하는 것일 수 있겠다. 축제가 여전히 즐겁다. 몸도 마음도 고되고, 여전히 축제는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가 지닌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즐겁다. 축제를 해내고야 마는 힘이 내 안에 있다고 느끼고, 동료들과 함께 라면 그 힘을 발휘할 용기가 생기곤 한다. 일탈, 환상, 경이와 감격, 함께 무언가를 해낸다는 성취가 여전히 축제를 하는 나에게 있다.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 역시 즐겁다.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시대가 변하며 축제도 변한다. 그 변화의 흐름을 발견하고, 이전에 없던 축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들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기여하고 싶다. 내가 많은 것들을 배우고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축제가 그런 일들을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8. [삶의 질] 축제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은 질은 어떠한가? 내가 축제인으로 사는 것이 내 삶의 질에 어느 정도 영향을, 어떤 방식으로 주고 있나?


축제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서로를 ‘메뚜기’라고 부르곤 했다. 봄이면 이 축제에서 일했다가, 가을이면 저 축제에서 일하곤 하는 ‘축제 메뚜기들’이었다. 축제가 좋고, 축제에서 일하는 것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이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축제들은 핵심 인력들조차 안정적인 고용 환경을 보장 받지 못한다. 공공이나 민간의 별도 재원 조성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 직접 축제를 만들어가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나의 복지는 스스로 챙겨야 하고, 나의 미래 설계도 내 몫이다. 축제가 재원과 인프라의 차원에서 안정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축제에서 일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환경에 이미 적응하여 불안정한 상태를 당연히 여기곤 한다.


메뚜기 뛰는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곤 했다. 축제 하나에 오롯이 집중해서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내야하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스스로의 노동으로 빈 구석을 메꿨다. 워라밸 같은 단어는 생경하게만 느껴진다. 일이 나이고, 내가 일인 상태가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퇴근이 없이 끊임 없이 일과 연결되어 있다. 축제라는 큰 퍼즐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서는 잠시도 멈추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건강한가. 축제가 시작되고 나면 그 모든 노동의 시간을 잠시 잊는다. 축제가 주는 환희가 잠시 고통을 상쇄한다. 삶의 질은 어떠한가. 언제까지 이런 방식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삶의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9. [사회적 정체성] 사회의 역사, 예술의 역사, 지역의 역사, 씬의 역사 등,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나 성격을 생각하거나 느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축제의 이웃이 다양해지고 두터워지면 축제는 이내 동시대의 미시사를 읽어낸다. 굵은 글씨로 쓰여진 한 줄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페이지 아래에 쌓인 시간들을 두껍게 읽어내는 것이다. 축제는 이웃과 함께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축제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일상의 풍경을 빌려서 새로운 장면들을 만들어내는 축제의 힘이 작용한다.


예술가들은 축제에서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고, 예술이라는 이름의 연대를 실천한다. 이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이 축제의 규모에 기대어 가능하게 되고, 새로운 실험과 창조적인 발견들을 이어간다. 축제의 시간이 쌓이며 축제에서 만났던 이들은 다시 축제에 기여할 새로운 방식을 찾는다. 예술가와 축제는 긴 호흡으로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돕는 존재가 된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극단 HOBT에서 잠시 인턴으로 일하며 40년을 지속해온 축제 ‘메이데이 페스티벌’을 살펴볼 수 있었다. 40년이 넘도록 한 도시에서 이어져온 축제는 도시와 함께 성장했다. 축제를 보고 자라난 아이들은 예술가가 되고, 스태프가 되었다. 축제를 사랑하는 후원자가 되었다. 도시의 협동조합은 축제를 후원하기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시민들은 각자가 가진 것을 기부하며 축제의 재원을 마련한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축제에 관여하며, 도시 공동체에 필요한 축제를 스스로 상상하고 구현해낸다.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예술을 통해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축제라는 비일상성의 자리를 통해 잊혀졌던 공동체의 시간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축제 기획자는 이 모든 가능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매개자이다. 자명하게 드러난 것들을 넘어서서 현재와 현상의 너머에 존재하는 가능성들을 살피고 창조적인 접근으로 이 가능성들을 엮어낸다. 축제는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직조하는 것에 가깝다.


10. [후속 세대] 내 이후 세대의 축제인이 어떠한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하거나 기대해본 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내 이후 세대의 축제인들은 나와 우리 시대의 축제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새로운 축제의 모델을 개발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만 했던 기존의 축제의 문법을 바꿔내리라. 그 과정에서 축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피고, 더 건강한 방식으로 일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내리라 생각한다. 축제인이라는 전문가들이 더 존중받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 미련 없이 훌훌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축제 기획자/관계자로서의 나> 자문화 기술지

2022.12.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말랑하고 유연한 할머니 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