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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맛, 청실홍실 메밀국수

드디어 여름이 왔다

by 피존밀크




누가 최근 나에게 사계 중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 후, 여름이라고 답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 될 줄이야. 인생 길게 살고 볼 일이다.


과거의 나는 여름을 참 싫어했다. 한국의 후덥지근한 무더위도 싫고 각종 날벌레 달라붙는 것도 싫고 남들은 덥다고 헐벗고 다니는데 나는 몸매가 남 보여주기 매우 부족하여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해서 싫고 등등등. 중년이 된 지금도 앞에서 말한 여름의 단점은 여전히 싫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처럼 마냥 싫지만은 않다.


어릴 땐 봄, 가을이 참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해당 계절에 유독 우울감이 짙어졌다. 특히 가을엔 말도 못 할 지경. 그럼 겨울은 어떠한가. 아주 어릴 땐 눈 내리는 풍경을 참 좋아했었다. 근데 운전을 시작한 이래로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기분이 든다. 어릴 때 순수함을 잃어버린 드라이빙 중년에겐 겨울은 그저 차만 더러워지고 운전하기 힘든 계절만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계절의 단점을 찾고 나니 상대적으로 여름의 강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럼 여름의 장점은 뭘까? 날이 덥긴 하지만 에어컨 틀어놓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시원하다. 그리고 여름엔 내가 그나마 좋아하는 과일이 등장한다. 난 의외로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나마 먹는 과일들이 여름에 나는 과일들이다. 수박, 참외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여름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다. 대표적인 여름 음식인 팥빙수, 호박잎, 그리고 메밀국수.






어릴 때 부모님과 일식 돈가스집을 간 적이 있었다. 나와 동생, 엄마는 돈가스를 먹었는데 아빠는 유독 혼자 메밀국수를 먹었다. 시커먼 국물 안에 시커먼 국수를 쿡쿡 적셔 먹는 모습. 그땐 저런 음식을 왜 돈가스 집에서 잡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메밀국수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리 좋지 않았었다.


지금 내가 정착한 도시, 인천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예전 직장 동료가 놀러 왔다. 그녀는 인천 토박이라 인천의 각종 맛집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우리 동네에 유명한 맛집 본점이 있다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집에서 조금 걸어가니 신포시장이 나왔고, 그 근처에 '청실홍실'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청실홍실'이라... 이름 참 정겹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곳에서 파는 메뉴는 더욱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 아빠가 잡수시던 시커먼 국수가 전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 일부러 그곳으로 데려간 그녀의 정성을 거절할 순 없었다.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 메밀국수 한 판과 통만두 한 판을 시켰다.


메밀국수를 육수에 그냥 찍어먹으려 했더니 나름 먹는 방법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벽에 붙어있는 대로 육수에 무즙, 파 등을 넣은 후 국수를 찍어 먹었다. 고소한 메밀국수와 짭짤한 육수의 조화는 참 좋았다. 게다가 입이 살짝 심심해지려고 할 때 통만두 하나씩 입어 넣어주면 되니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이렇게 한 젓가락 두 젓가락 먹다 보니 국수판에 있던 국수와 만두가 싹 사라졌다. 이래서 그녀가 날 이곳으로 데려왔구나. 이래서 아빠가 돈가스 집에서 메밀국수를 먹었던 것이구나.


그 뒤로 혼자서도 씩씩하게 청실홍실에 들러 메밀국수와 통만두를 먹었다. 여자 혼자 먹기에 양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고독한 대식가이기 때문에 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청실홍실의 통만두는 묵직한 고기만두라기보단 좀 라이트 한 식감의 만두이기 때문에 혼자 한 판 먹을 수 있다.


... 물론 다 못 먹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하지만.






5월 말이 되면 대지가 푹해진다. 비록 수족냉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년이지만 이런 날씨엔 나 역시 더위를 느낀다. 이렇게 갑자기 덥고 습해지면 머릿속에는 저절로 청실홍실 메밀국수가 떠오른다. 그럼 먹어줘야 인지상정! 다행히 청실홍실은 인천 안에서는 직영점이 많아 집 가까운 곳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본점 대신 우리 동네에 있는 청실홍실에 갔다.



메밀국수 짝꿍, 통만두는 못 참지. 소식가 분들도 꼭 시켜 드시길 바란다. 이곳의 만두는 여전히 가볍다. 묵직한 만두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 만두 맛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메밀국수와 먹다 보면 이 만두와 국수와의 조화가 완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수는 이와 같이 제조한다.



탱글탱글 메밀국수가 나왔다. 밀가루와 메밀국수가 잘 섞여있어 메밀 특유의 푸석함은 없고 오히려 쫄깃하다.



내 스타일대로 육수를 제조해 봤다. 무즙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넣기!



국수를 육수에 담갔다가 후루룩 먹는다. 면치기를 하니 쫄깃한 면발이 내 입가를 탁 친다. 우물우물 씹다 보면 메밀 특유의 구수함과 육수의 감칠맛의 조화가 참 좋다. 그리고 통만두 하나 딱 먹어주면 메밀국수와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무게감을 준다.


한참 국수와 만두를 먹다 보니 어느새 그릇들은 텅텅 비었다. 부른 배를 두들기며 밖으로 나가자 무거운 습기가 날 훅 덮친다. 아까 가게에 들어올 때만 해도 참 더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쩐지 좀 시원해진 기분이다. 가게에서 에어컨 바람을 많이 맞아서 그런 걸까, 아님 메밀국수가 무더위를 조금 식혀준 덕분일까. 내 머리는 둘 다 정답이라고 말하지만 내 마음은 메밀국수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다.

거 메밀국수 먹기 좋은 날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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