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만 만끽할 수 있는 여름의 맛
직장에서 외근이 잦던 시절, 급식을 먹는 대신 도시락을 싸가곤 했었다. 특히 매주 금요일은 직장에 모인 외근 동료들이 서로 둘러앉아 점심식사를 하곤 했다. 동료 중 최고참이 자신의 도시락 꾸러미를 풀며 이렇게 말했다.
난 이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더라고!
그녀의 도시락통에서 나온 음식은 바로 호박잎이었다. 차갑게 식은 호박잎 줄기를 얇게 떼어낸 후, 밥을 싸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니 저 호박잎의 맛이 참 궁금해졌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호박잎 맛을 몰랐냐고? 그렇다, 난 호박잎에 대한 추억이 딱히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릴 때 엄마가 먹으라고 해서 억지로 먹어봤는데 그 맛이 참 씁쓸하고 고약했다. 그 뒤로 굳이 찾아먹지 않았던 푸성귀였는데 그녀의 야무진 먹방이 호박잎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웠다.
마켓컬리에서 검색해 보니 호박잎이 나왔다. 근데 인기가 꽤 많은 건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 재고 5개 미만이라는 알림이 떠있었다. 급한 마음이 들어 후다닥 주문을 했다. 호박잎은 왠지 강된장과 함께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것도 주문했다.
집에 도착한 호박잎을 보니 뭔가 막막해졌다. 일단 이걸 어떻게 해 먹어야 할지 영 모르겠어서이다. 유튜브 검색을 해보니 쪄먹는 것 같아 그렇게 해봤다. 얼마나 쪄야 할지 몰라서 만두 찌는 시간 정도로 쪄봤다. 근데 그 '만두 찌는 시간'은 호박잎에게는 영겁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푹푹 쪄댄 호박잎은 곤죽이 되어 나왔고, 배가 고픈 나는 그냥 냉장실에 있던 상추를 꺼내 강된장과 함께 먹었다.
위의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다시피, 호박잎을 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시금치를 데칠 때도 1분 안에 해결하지 않는가. 호박잎 역시 그 정도의 시간만 요구하는 여린 푸성귀일 뿐이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호박잎 재입고를 기다렸지만, 나 같은 사람이 상당히 많은 건지 초저녁만 되어도 금세 품절이 나곤 했다. 여러 날을 기다린 끝에 난 두 번째 호박잎을 집에 들일 수 있었고, 과거의 실수를 타산지석 삼아 그럭저럭 근사한 호박잎쌈을 먹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 먹어본 호박잎은 쓴맛이 어릴 때만큼 강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혀의 미뢰가 발달하여 호박잎의 쓴맛이 한결 중화되어 느껴지는 건지, 노지 호박잎이 아닌 하우스 출신이라 맛이 연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좌우지간 나이 먹어 다시 먹어본 호박잎은 쓴맛보다는 오히려 고소한 맛이 강했다. 거기에 강된장 혹은 쌈장만 곁들이면 최고의 여름 한 상이 되었다. 이 소박하고 깔끔한 쌈을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즐길 수 있다니, 어린이들은 좀 아쉬울 수도 있겠다.
2025년 여름, 드디어 호박잎이 입고되었다. 이른 시간에 발견한 터라 재고는 넉넉하다. 재빨리 장바구니에 담고 다음 날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1년 만에 만난 호박잎은 여전히 푸르고 거슬거슬했다. 저 촉감 때문에 줄기 쪽에 있는 막을 벗겨 먹곤 하는데 난 귀찮아서 줄기는 다 잘라버린다(...)
집에 계란찜기가 있지만, 그 찜기는 호박잎이 들어가기엔 너무나 좁다. 그래서 오랜만에 수납장 깊숙이 박혀 있던 찜기를 꺼냈다. 호박잎 덕분에 내 묵은 살림이 콧바람을 쐰다.
호박잎 짝꿍, 강된장도 준비했다.
강된장은 애석하게도 시판이다. 하지만 참 맛있었다. 다음에 또 시켜 먹을 의향 있음!
호박잎과 강된장이 함께 오른 밥상, 이게 진정한 여름 밥상이 아닐까?
올해 호박잎은 예년보다 더 연한 느낌을 줬다. 저 거슬거슬한 친구들도 굳이 벗기지 않아도 먹을만하더라.
호박잎에 밥 한 술 뜬 후, 강된장을 넣어 돌돌 말아준다. 그리고 입안에 쏙! 우물우물 씹다 보면 호박잎의 고소하고 쌉쌀한 맛, 강된장의 구수한 맛, 밥알의 달콤함이 하모니를 이룬다. 한 알 한 알 돌돌 말아 입에 쏙쏙 넣다 보면 찜기 가득했던 호박잎은 어느새 사라져 있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 그리고 여름이 되어서 좋은 점은 이렇게 고기 한 점 없어도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호박잎만큼은 여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제철음식이니 재고가 있을 때 부지런히 잡수시기를 강력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