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밤새 내린 눈이 창 밖을 하얗게 수놓았다. 잠시 눈구경을 하다가 습관처럼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의 첫 메시지는 엄마에게 왔다.
오늘 형부 결혼식이래. 큰 아빠 목소리가 다 메이셨더라.
6년 전 11월 마지막 날, 나의 사촌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3일 밤낮을 울었던 시간이 어제 같은데 벌써 6년 전이다. 내가 슬프다한들 큰집 식구들만큼, 어미를 잃은 돌잡이 아기만큼, 둘째를 기다리던 아빠만큼 슬플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큰집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가끔 언니가 쉬고 있는 추모공원에 다녀오는 것뿐이었다. 이 행동은 내가 정말 슬퍼서 하는 것일까, 아님 의무적으로 하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슬픔이 위선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한없이 부끄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 난 추모를 멈출 수 없었다.
몇 달 전, 형부의 재혼 소식을 알게 됐다.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아빠의 칠순잔치가 열렸다. 큰 집 식구들은 칠순 잔치에 온 친지들을 위해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애써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돌잡이 었던 언니의 아들은 유치원 큰 형님이 되었다. 우리가 저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아이는 몇 살이 되었을까. 아니, 우리가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슬퍼만 하며 살 것이냐,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냐.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 하지만 저 말들이 주는 상처를 피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시간이 6년이 되어서인지 내 맘에 난 생채기를 멍하게 바라볼 수 있을 수준은 되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맞다. 삶은 계속되고 영원한 슬픔도 영원한 기쁨도 없다. 하지만 수많은 말 중에 죽은 자와 남은 자들을 위한 말은 없다. 그들은 이 영겁의 시간을 과연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캠핑카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새 내린 눈은 이 세상을 너무나 눈부시게 바꾸어놨다.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먹먹한데 그 와중에도 이 설경이 아름답단 생각이 든다. 난 이 와중에 아름답단 생각을 할 수 있는 종자로구나. 나의 이중성이 역겹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것 역시 삶이고 인생이다.
형부가 행복하길 바란다. 이건 진심이다. 엄마 없이 늘 외롭게 자란 조카가 이젠 그 빈틈을 행복으로 꽉 채워줄 좋은 엄마를 만나길 바란다.
죽은 자는 오늘도 말이 없다.
남은 자들은 함께 침묵하며 내 앞에 주어진 생을 바라본다.
사랑은 왜 이리도 아름다울까, 왜 이리도 고통스러울까.
눈이 멀 정도로 황홀한 설경은 왜 이리도 시릴까.
순간의 명과 암에 대해 난 언제쯤 순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