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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Apr 01. 2021

노선 변경은 어려운 타입이라

뉴 페이스의 등장이 지난 연애에 미치는 영향



6년 연애를 끝내니 보이는 건, 누구나 그렇듯 계절 따라 환기되는 우리의 시간 속 어디든 머무르는 그와 나의 모습이었다. 이별하고 나니 정말 급한 일 아니고서는 6년 내내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줬던 그의 스윗함이 가장 불편했다.


     다급한 출근길이나 꽉 막히는 퇴근길이 아닐 경우, 언제나 나는 우리 집까지 가는 버스 중 굽이 굽이 돌아 산길을 껴안듯 스무드하게 올라가는 버스에 오른다. 직선거리가 아니기에 돌아가는 만큼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꽤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자연을 눈에 오래 담고 바뀌는 계절을 체감하기에 적당한 노선이 없기 때문이다. 구태여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근처를 거니는 것만으로 행복을 주는 버스가 있다면 바로 그 지선 버스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그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홀로 타고 내렸던 순간이 손에 꼽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그 버스에 오르면 기나긴 산길을 따라 오르던 우리를 오래도록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애정행각을 벌이며 꽁냥 대던 우리,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나눠 낀 에어 팟으로 하루 끝의 쉼을 공유하던 우리, 눈물을 머금으며 서로의 기분을 관철시키던 우리 등.



     반가운 건 그 지선 버스에 오른 이래로 처음 새로운 기사님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었다. 모든 게 제자리에 고여있듯 익숙한 그 버스를 운행하시는 분이 뉴페이스에다 여성분이라는 사실은 깨나 신선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의 오래된 기억을 새로운 추억거리로 변모하게 했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서 오세요! 그분의 인사에 평소보다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후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기사님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기사님은 정차하실 때마다 뒷문을 열기 전 승객들의 안전을 두어 번 살피셨고 버스에 오른 승객들이 자리에 앉기까지 기다린 후 운행을 시작하셨다. 물론 다소 느릿한 속도에 답답해하는 승객들도 없잖아 있었지만 출, 퇴근길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 창밖을 바라보며 저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를 눈에 담았다. 곧이어 버스는 내가 가장 괴로워했던 산길 중턱으로 들어섰다. 눈을 질끈 감을까 생각해봤지만 눈을 감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을 리 만무했다. 그때, 기사님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여러분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켜주세요오옹~~


     지금껏 만나온 기사님들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돌아온 계절을 애써 피할 필요는 없다는 듯, 기사님의 말씀은 봄의 향수를 만끽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라디오 DJ의 대사처럼 느껴졌다. 창문을 열고 슬쩍 눈을 돌리니 정말 완연한 봄이 되어 있었다. 계절 냄새 맡는 것을 즐기던 내가 봄 냄새를 맡지 못하다니. 얼마간 지나오는 곳곳이 전부 그와의 추억 장소라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던 내게도 봄바람이, 꽃냄새가 물씬 스며들었다. 기분 좋게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그 기사님에 대해 엄마도 아느냐고 뽀송에게 물었다. 뽀송은 내 물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 새로 오신 여성 기사님 말이니?라는 첫마디로 속사포 랩을 하듯 뱉어냈다.




그분 버스 너도 탔구나? 아니 글쎄~ 그 지선 버스는 지금까지 여성 기사분이 딱 두 분 이셨는데~ 그전에 하셨던 분인지, 그다음 분인지 잘은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분이, 우리 교회 교인이셨다는 거야. 근데 그분 남편 분인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힘드셨는데, 그 버스 운행하면서 많이 괜찮아지셨나 보더라구~ 근데 그분 운전 되게 편안하게 잘하시지 않니? 엄마는 그분이 운행하시는 버스만 타면 멀미도 안 나고 좋더라구~~ 왜, 운전대 잡는 사람 기분 따라 그 사람 기분이 차 타는 사람한테도 전이되는 거 너 알지?(끊어낼 수 없는 뽀송의 수다, 면허는 없지만 알 것 같아...) 그래서 왜, 엄마가 운전대만 잡으면 네 아빠가 주저리주저리~아주 잔소리 잔소리를 옆에서 해가지고 엄마가 네 아빠랑만 타면 운전이 괴팍해지고~막 정신없이 난리 난리를~~~네 아빠가 운전하면 또 너희가 멀미 난다고 천천히 가라고 뒤에서 또 잔소리를 하고(삐--------이)




     아뿔싸. 괜한 물꼬를 텄다. 세월 가니 자연스레 발달된 능력 하나를 꼽자면  귀에 대고 누가 어떤 말들을 냅다 내리꽂아도, 나는  귀에 듣기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필터링해 들을  있다는 것이다. 뽀송은 대체  근래 들어 호사가가   마냥 얼굴도 익숙지 않은 누군가에 대해 카더라 통신을 유포하는 걸까.  나이 들어 봐야 알겠지만, 엄마 역시 그분의 사려 깊은 운행에 감격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새로움을 나만 느낀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애정 하는 버스를 잠시라도 떠나 노선을 변경해야 하나 싶던 찰나에 그분을 만났다. 아련하고 저릿해 마주하기 힘들었던 첫사랑과의 추억이 귀감이 되는 버스로 새로이 탄생했다. 여전히 쓰린 속을 달래는 중이지만 여하튼 기분 좋은 귀갓길이었다. 아무래도 이직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고군분투하는 백수생활을 영위하는  우리에게서 떠난 계절을 홀로 맞이하고 싶을 때마다  버스에 왕왕 오를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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