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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Apr 17. 2021

순환하는 세계

변환의 시점



  창문을 열자 따사로운 볕이  움큼 새어 들어왔다. 온몸이 찌뿌듯한 것이,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밖이란, 동을 벗어날 정도의 거리를 뜻한다. 적어도 광화문 이상은 벗어나야 한다. 평소에 근거리로 약속을 잡으면 지인들에게 종로 바닥은   손안에 있다는 장난을 칠만큼 구석구석 제대로 돌아다녔었는데, 최근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 배회할 겨를도 없었다. 백수의 삶이 5개월째 지속되다 보니, 심적인 부담감을 비롯해 텅장 잔고가 아른거려 주기적으로 여유를 부릴 만한 것이라고는 교보에 가서 시집 구매하기, 무작정 동네 카페 마실 가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딸이 갑갑해하던 걸 눈치챘는지, 모카포트로 내린 모닝커피를 연달아 세 잔째 마시는 내게 엄마 뽀송이 머리 좀 감고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럴 땐 둘도 없는 친구처럼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나의 뽀송이 딸을 위해 비상금을 좀 풀어볼 계획인가 보다. 조금 지저분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집에 박혀 있을 때는 쥐 죽은 듯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싸돌아 다닐 때는 라떼(반려견)가 아니면 굳이 일찍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유독 집에 오래 박혀 있을 때면 머리 감는 것조차 귀찮아 언제 감아야 될지 날짜를 헤아린다. 이틀을 넘어서면 머리를 묶고 있어도 이마로 내려오다 얼굴 전체를 뒤덮는 듯한 특유의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서다. 세수와 양치는 끼니처럼 거르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만 화장하는 건 또 어지간히 귀찮다. 쓰면서 느꼈는데 이래서 내가 틀어박혀 있기를 선택한 날에는 외출을 꺼리나 보다. 그래도 간만에 화장을 하니 기분은 또 업됐다.



       외출 전에는 반드시 라떼와  3-40분 정도 산책을 한다. 구성원의 외출 후 라떼가 혼자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낮잠 자기를 바라서다. 꼬순내와 비릿한 흙냄새가 절묘하게 섞인 라떼의 회갈빛 발을 닦이고 작은 까까를 줬다. 보상심리 철저한 라떼는 이제 충성 어린 자세로 우리가 외출할 시 자신에게 돌아가는 다소 큰(?) 까까를 기다린다. 외출 전 모든 일정이 급박하게 마무리됐다. 근데 다리에 힘이 좀 풀렸다. 몰티즈의 깜찍한 얼굴에 속으면 큰 코 다친다는 듯 도베르만 같은 가슴 근육의 원동력으로 뜀박질을 이어가는 라떼를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체력이 바닥난다. 그렇게 우리는 외출 전 라떼와 짧은 산책을 하고 난 뒤 여분의 에너지로 꾸역꾸역 집 밖을 나섰다.



       라일락 향기를 만끽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날씨가 또 있을까. 나오길 잘했다며 해가 찬찬히 스며들고 있는 나뭇잎들을 보다 봄에 태어나 봄이 좋은가, 요새는 가을이 더 좋던데. 하던 찰나였다. 북촌 근방을 산책하자며 검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가리키던 뽀송의 손이 갈 길을 잃었다.  지도를 잘 못 보는 치명적인 한계를 가진 나는 지도를 더듬어본다. 한 번 다녀온 곳은 기억에 의존하여 줄곧 잘 다니는 편인데, 처음 가는 길에선 나역시 수없이 헤맨다. 누가 내 엄마 아니랄까 봐 뽀송은 나의 치명적 약점을 뛰어넘는 완벽한 길치다. 지도도 잘 못 보지만 주마등처럼 스치는 기억만 붙잡고 있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운전을 하고 다닌 건지 돌아보니 그녀의 차에는 언제나 길을 일러주는 친절한 여성(내비게이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걷기를 자처할 때도 뽀송의 목적지 선정 기준은 딱히 없었다. 나도 나지만, 그녀는 뛰어난 즉흥성을 지녔다. 그날 역시 지인과 걸었다던 문제의 '그' 산책길을 찾지 못해 결국 발길이 익숙한 삼청동으로 새게 된 것이다.



       삼청동은 그동안 내가 알던 동네와는 딴판이 되어 있었다. 관광객은 물론이거니와 한복을 입고 길목을 거닐던 한국인조차 손에 꼽을 만큼 없었다. 그저 휑하고 고요했다. 자연을 즐기기에는 적당히 적적하고 한적하니 좋았지만 웃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모든 것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길의 양쪽을 수놓던 가게들에는 대부분 임대 딱지가 붙어 있었고,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온 골목이 어둠에 잠식되고 있었다. 꺼지는 불빛을 따라 긴 연애 기간 동안 그와 다녔던 수많은 추억 장소들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막연히 서운했고 불현듯 서글펐다. 뽀송과 나는 근방의 연수원을 지나면서 아빠가 건강했다면 담배 냄새 그득한 여의도를 벗어나 그곳으로 출퇴근했을 텐데 그랬으면 좀 나아졌을까 생각했고, 시래깃국을 먹으면서는 둘째가 옆에 없는 게 아직도 이상하다며 한탄을 했다. 엄마는 둘째를 진주에 떨어뜨리고 온 이후, 자식들의 독립 시기가 당도했다는 사실이 자못 실감 났는지 아빠를 상기하면서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어떨 때는 둘째가 옆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나면

     갑자기 울컥하고 이상해.  


   어느새 뽀송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의 말을 듣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져 들고 있던 막걸리를 꿀꺽꿀꺽 넘긴 후 호탕하게 대답했다.


     거 봐, 시끄러운 우리가 옆에 붙어있다가 떨어지면

     엄마 외로워서 못 산다니까?

     둘째는 어쩔 수 없이 독립하게 될 테고,

     막내도 언제 군대 갈지 모르니까.

     엄마밖에 모르는 이 장녀가 쭉~

     그대 옆에 붙어서 평생 재밌게 해 주겠다니까.

      그냥 넙죽 받아들이고 그래, 같이 살자 하면 되지!

     싫기는 또 왜 싫대?


    뽀송은 또 좋으면서 싫은 척, 붙어있던 내내 찾지도 않던 격을 따지기 시작했고 으른인 척 태세 전환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얘가 아무리 그래도!

       으른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아주!

       그대? 내가 너무 격 없이 키웠지?

        너도 네가 원하던 곳에 들어가면

       다시 연애도 하고 응?

       좋은 사람이랑 결혼 생각도 해야지.

   

        (촤암나) 속으로는 좋으면서.



     여하튼 엄마는 내 앞에서 괜한 자존심을 세우려 한다. 속으로는 좋으면서. 텅 빈 골목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담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꽃은 지난봄처럼 있는 힘을 다해 아름답게 피어있는데, 여느 때처럼 만끽하고 감상해줄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떠나보내야 할 것 투성인지, 당최 마음의 준비를 위한 시간이 인생 내부에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막연히 들이닥친 변화에 어떤 식으로든 적응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분통하고 가슴 아팠다.



       집에 오는 길, 여러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가게에서 뽀송의 라탄 버킷햇을 샀다. 고작 몇만 원짜리에 불과했지만 뽀송 손에 뭐든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우리 모녀는 근래에 괜찮은 척을 자주 한다. 엄마는 이런 거 필요 없다고 괜찮은 척, 나는 내 거는 이미 많다고 괜찮은 척. 서로 득 될 것 없는 실랑이를 하다 마침내 하나를 골랐지만 나는 지난번에 봐 둔 더 비싸고 예쁜 모자가 눈에 밟혔다. 고맙게도 엄마는 그것조차 예쁘다고 집에 오자마자 모자를 쓴 후 라떼에게 실컷 자랑을 했다.

라떼야. 큰 누나가 엄마 모자 사줬다~ 어때 예쁘지? 하면서. 언제부턴지 내 것보다 뽀송의 것을 먼저 살피게 된다. 모자를 이것저것 써보면서 뽀송 역시 엄마의 엄마를 생각했다. 네 할머니도 어울릴 것 같지 않느냐며. 이런 라탄 소재의 가벼운 모자는 없었던 것 같다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부모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내게 부족한 것들이나 사주고 싶은 것들을 선물하였으나, 지금은 내가 엄마의 곳곳을 습관처럼 살피고 잔소리 폭격을 날린다. 인지하지 못한 새 어느 시점에서 우리의 자리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생명의 순환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인간 세계의 순환은 혹여 기억에 의해 움직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제 어린아이를 살폈듯, 성장한 자식이 나이 들어 어린아이가 된 부모를 다시 돌보게 된다. 기억에 의한 관습인 듯, 절로 재현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한 듯 한 그 모습을 돌이켜 보며 순환의 시점을 생각했다. 모든 것에는 일련의 순환 과정이 있고 그날 발견한 특정 모습에서 부모 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순환을 발견했다면, 그것이 내 윗세대가 일궈온 세계의 단면이 아닐까 하고.



      결국엔 서로가 서로를 굽어 살피고 눈으로, 귀로 가끔은 입(잔소리)으로 터치하게 됨으로써 세계의 순환을 실현한다. 그리 생각하다 보니 비단 부모 자식 간의 순환에 멈출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것 그 외 코로나로 벌어진 변화들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변화가 들이닥쳐도 세계는 순환하게 되어있다. 그렇기에 너무 오래 슬퍼하거나 많이 급급해하지 않고 순환되는 순간을 자주 상기해 보려 한다.


       자연만이 설명할 수 있는 광경이 있다. 언어로조차 변환할 수 없는 경이로운 순환의 세계, 그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배경. 그 배경을 담고 싶은 마음에 매번 자연스레 카메라를 들지만 실상 눈에 담는 것만큼 충분하지는 않아 보인다. 자연속에 조화로이 배인 사람들의 미소가 무척이나 그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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