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친구와 집에서 포커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집주인 이뇨만이 스쿠터 대여 비용을 받으러 잠시 집에 들렀다. 그제야 대여 기간이었던 일주일이 벌써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해진 일과도 없고 핸드폰도 잘 쓰지 않다 보니 요일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우붓에서 지낼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나는 이뇨만에게 우붓에서 떠나기 전에 가보면 좋을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는 뜨갈랄랑 라이스테라스(Tegalalang Rice Terrace)와 낀따마니 화산(Kintamani Volcano)을 구경해보라고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발리에 대해 거의 알아보지 않았던 터라 잘 몰랐지만, 돌아와서 찾아보니 포털에서 ‘우붓’의 연관검색어로 항상 뜰만큼 유명한 관광지였다.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지만) 첫 목적지였던 뜨갈랄랑 라이스테라스. 실제로 농사를 짓는 논이다.
아무튼 열대기후 지역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친구와 내일 바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이뇨만은 “스쿠터로 가기에는 길이 험하고 너무 멀다. 하루만 택시 투어를 하는 게 낫다"고 권했다. 그러면서 택시 기사를 소개해주려는 눈치여서 정말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가 “기사는 내가 하겠다"는 것이 아니겠나. 5만원만 내면 하루 종일 우리를 태우고 투어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 묵으니까 싸게 해 준다"며 넉살 좋게 웃었다. 새로운 상술인가 싶었지만, ‘어딜 가나 건물주는 여유롭구나’ 싶어 흥미로운 마음에 승낙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투어를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눈도 다 못 뜨고 조식을 먹으러 마당으로 나갔다가 하우스메이드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랬듯이 활짝 웃으며 "굿 모닝" 인사를 해주었다. 방금 막 일어난 모습이 민망하다 싶었는데 그는 곧바로 풀장 옆의 작은 탑 앞으로 가서 정성스레 향을 피웠다. '어, 장식 아니었나?' 눈이 번쩍 떠졌다. 과거 조선시대에 집 안에 사당을 두었던 것처럼, 신을 모시는 탑이라고 했다. 하우스메이드는 매일 아침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린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처음 본 광경이었다.
풀장의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탑. 조상신과 토착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용도다.
이뇨만을 만나 그의 차에 올랐다. 조금 전에 본 의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발리에서는 집 안에 기도를 드리고 향을 피우기 위해 작은 탑을 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그 탑은 이뇨만이 자신의 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 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꼭 기도의 대상이 조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마을의 신’ 등 여러 토착 신에게도 동시에 기도한다.
이뇨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발리 주민들에게 신의 존재감은 굉장히 큰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조상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뇨만은 "유산으로 받은 땅에 빌라 페테카(내가 묵은 집)를 지은 것이므로 더욱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상의 복 덕분에 부유한 건물주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의 숙박료는 1박에 약 3만8천원이었다. 개인 풀장이 딸린 단독 주택 치고는 굉장히 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붓의 물가를 고려했을 때 비싼 축에 속했다.
우붓 중심지에 위치한 우붓 궁(Ubud Palace)에도 물론 사원이 있다.
발리의 부동산은 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넘어온 재벌 이민자들이 발리의 땅을 계속 사들인다고 했다. 이뇨만은 "이 집은 한국 돈으로 4억 정도에 팔 수 있다. 하지만 이 유산을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 목적지인 라이스테라스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나는 이뇨만과 거의 쉬지 않고 대화하며 그 길을 달렸다. 내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었고 그의 영어 억양이 익숙한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했다. 하루의 시작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