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it orozi Jun 21. 2018

나의 반항과 당신의 부조리

칼리굴라·오해 / 알베르 카뮈


<칼리굴라>와 <오해>는 각각 1945년과 1944년, <시지프 신화>를 발표하면서 그만의 부조리 철학을 정립한 카뮈의 희곡입니다. 카뮈의 작품 중 그렇게 대중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 그랬듯 희곡이라는 장르는 저자의 철학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한 번쯤은 읽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배경은 다르지만 두 작품은 합이라도 맞춘 듯 비슷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화영 번역가 분께서 이를 한 책에 두신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을까요?


칼리굴라

 칼리굴라는 로마의 황제로 흔히 '폭군'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은 '폭군이었는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한 편이지만 보통은 즉위 당시에는 시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중병을 앓고 난 뒤 정신이 망가져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실정을 일삼다가 결국 측근들에게 암살당했다고 하죠.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는 이 로마의 황제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1막에서 로마 귀족들은 사랑하던 누이가 죽은 칼리굴라가 정신이 나갔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이 재산을 상속할 수 없도록 압박을 넣습니다. 1막에서의 칼리굴라의 모습이 실정에 가까울까요? 거기에 칼리굴라는 측근 헬리콘에게 속내를 비칩니다. 달을 따오라고요.


칼리굴라        찾기가 어려웠어.
헬리콘           아니, 뭐가요?
칼리굴라        내가 갖고 싶었던 것.
헬리콘           뭘 그리 갖고 싶었는데요?
칼리굴라       (여전히 자연스럽게) 달 말야.


그리고 이어서,  그렇다면 그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기 때문이야. 나는, 모두가 진리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거야!

 칼리굴라 역시 달을 따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란 걸 압니다. 그에게 '달'이라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진리의 이정표죠. 불가능한 것은 카뮈의 말마따나 부조리한 것이며 이를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반항'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지프 신화>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반항을 칼리굴라가 실천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가 추구했던 반항이라는 것이 타인의 죽음, 그러니까 타인이 처해 있는 부조리를 칼리굴라가 조절하고 싶었다는 거죠.


 3년 뒤로 이어지는 2막부터 칼리굴라는 무고한 자를 사형에 처하거나 귀족의 아내를 성노리개를 쓰는 등 폭군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칼리굴라는 헬리콘에게 달을 따오라는 명령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칼리굴라가 생각했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케레아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이건 나의 솔직한 심정의 피력이오. 당신네들의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 뒤에 당신네들의 그 어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도 나는 가세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오로지 다시금 수미일관해진 세계에서 평온을 되찾고 싶을 뿐이니까요. 내가 행동에 나서려는 것은 야심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인 공포 때문이오. 저 비인간적인 정열에 대한 공포 말이오. 그 비인간적 열정에 비겨보면 내 목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고 칼리굴라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중 케레아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극히 이성적이며 신념을 가진 사람입니다. 칼리굴라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인 공포 때문에 그의 폭정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이죠. 각자의 신념으로 부조리에 반항하는 이 둘, 케레아와 칼리굴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3막 6장이 이 희곡의 핵심입니다. 칼리굴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인지하고 케레아에게도 협박 아닌 협박을 하지만, 케레아 역시 그의 신념을 굽힐 생각이 없죠.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이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이 작품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칼리굴라는 놀랍지도 않지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음에 앞서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단말마 같은 유언은 타인에게 공포를 주었던 자신의 '반항'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부조리라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설사 권력을 가진 사람이더라도 이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개인은 그들이 처한 부조리에 반항해야 한다지만 타인의 부조리에 개입한다는 건, 오만한 기만입니다. <시지프 신화>의 다음 작품답게, 카뮈가 생각한 부조리 철학을 조금 더 보완하는 듯한 희곡이었습니다.

칼리굴라    칼리굴라! 너도, 너도 역시 죄인이야. 그렇다면 죄가 좀 더 많으냐 좀더 적으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그러나 누구 하나 무죄인 사람이 없고 재판관도 없는 이 세계에서 누가 감히 나를 벌주겠는가! (...) 나는 무서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도 경멸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내 영혼도 그와 똑같이 비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니 얼마나 구역질 나는 일인가. (...)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오해

 <오해>의 서사는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관을 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정체를 숨기고 나타납니다. 여관을 운영하고 있던 이들은 투숙객을 죽이고 돈을 갈취하려 합니다. 결국 살인에는 성공하지만, 탕아가 자신의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합니다.

 이는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감옥에 있을 때 옛 신문에서 봤던 체코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카뮈가 자신의 작품을 인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 서사 자체는 도시전설처럼 자주 전해 내려온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얀의 죽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아들이자 오빠의 죽음에, 그리고 그 죽음을 이끈 것이 그들 스스로라는 것을 인지하면 서부 터요. 1막에서부터 '어머니'는 살인으로 연명하는 삶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방관했으니 더는 삶을 이어나갈 이유가 없었고 자살을 택합니다. 이에 딸이자 여동생이었던 마르타는 이렇게 외칩니다.


마르타    오빠는 인생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받았어요. 오빠는 이 나라를 떠났어요. (...) 그러나 저는 이곳에 남아 있었죠. 초라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나는 이 궁벽한 대륙 깊숙이 처박힌 채 암담한 땅 속에서 따분하게 갇혀 자랐어요. (...) 어머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보상을 받아야만 되겠어요. 남자 하나 죽었다는 이유로,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 이 순간에 어머니가 슬쩍 피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에요. (...) 어머닌 저에게 아무것도 못하게 하셨고 오빠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모조리 다 빼앗아가셨어요. 그런데 오빠가 우리 어머니의 사랑까지도 빼앗아가야 하나요? 얼음장같이 차가운 강바닥으로 어머니를 영원히 데리고 가야만 한단 말인가요?


 마르타가 자신의 오빠를 살인한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그녀의 외침이 서글프게 들리는 것은 이 일련의 사건들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독자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얀이 처음부터 정체를 숨기지 않고 가족들에게 나타났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그랬다면 작품이 이어지지 않았겠지만, 얀이 진실 앞에 침묵하는 바람에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가 불어온 비극은 참담한 결말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얀'과 <이방인>의 '뫼르소'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얀이라는 인물의 성격이 뫼르소만큼 두드러진 것은 아니지만, 카뮈가 <오해>의 서문에 적은 내용을 본다면 조금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타인에게 올바르게 인식되기를 바란다면 단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침묵을 지키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면 사람은 고독하게 죽게 되고 그의 주위의 모든 것은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 반대로, 사실을 말한다면 그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타인과 자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나서 죽게 되는 것이다.                                                                                                                         A.C.


 얀은 그의 정체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한 가족이 모두 비극에 처하는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1막에서 그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까지 이방인으로 살 수는 없고, 이제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때가 왔다고. 하지만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버렸죠. 물론 온전히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요, 작품의 방향성은 그에게 맞춰진 것 같습니다.

 이 사태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되지 못했다는 점에 집중해본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너무도 진실되는 바람에 죽음을 맞게 된 뫼르소를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얀이나 뫼르소가 진실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결국 모든 사람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얀이 진실되었다면 그렇게 외롭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뫼르소는 진실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카뮈가 <오해>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결국 반항에 있어서 진실의 가치를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1942년의 <이방인>, 43년의 <시지프 신화>에 이어서 44년과 45년에 발표된 두 희곡은 앞에서 닦아놓은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보완해주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카뮈가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는 터에 더 많은 작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돌아보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