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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현 Aug 14. 2020

필록세라에 관하여 (3-3)

나비의 돌풍은 강력했다.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1884년, 프랑스 전체 포도밭의 40%가 사라졌다. 400만 에이커가 지도에서 지워졌고 농부들은 알제리와 아메리카로 떠났다. 보르도 그랑 크뤼의 주요 고객이던 워싱턴DC의 주문이 끊겼고, 영국 사람들은 위스키와 소다를 마셨다. 프랑스 와인 산업이 무너진 것이다.

사실 필록세라를 해결할 방법은 1869년에 이미 제시되었었다. 보르도에서 포도 농사를 짓던 레오 랄리망(Leo Laliman)은 미국 포도나무 뿌리가 필록세라에 면역력이 있다며 뿌리를 접목해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 양조자들은 그들의 고급 와인에서 싸구려 미국 와인 냄새가 날까봐 레오의 방법을 철저히 외면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하늘 아래 감히 프랑스 와인을 쳐다볼 그 어떤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의 빗방울이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시절이니, 미국의 맛이 스며들거라는 그들의 걱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렇게 20년이 지나는 동안 포도밭은 쑥대밭이 되고 온갖 기이한 치료제가 난무했다. 결국 18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텍사스 묘목 뿌리를 가져와 접목을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도, 뉴욕도 아닌 프랑스인들이 처음 들어보는 텍사스라는 동네의 묘목이라니.

프랑스의 자존심과 사라져가는 포도밭을 맞바꾸는데 꼬박 30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필록세라는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스위스로 퍼졌다. 그리고 1870년대 후반, 결국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퍼지며 서유럽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이탈리아는 유례없는 패닉에 빠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시칠리아는 필록세라가 안 퍼진 곳이 없었고 다른 지역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어지러운 시국을 정리하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들어선 지 채 20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필록세라는 전쟁보다 심각한 재앙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탈리아 농림부는 필록세라에 감염된 포도밭을 전부 불태우기에 이른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농부들은 어디로 갔을까?

30년은 긴 시간이다. 고난의 30년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당연하게도 수백만의 유럽인들이 알제리와 북미, 남미로 이주했다. 여기에는 실력 있는 포도 재배자, 와인 양조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와인의 기술적 도약을 이끌게 된다.

1847년부터 1939년까지 아르헨티나에 들어온 이민자 수는 700만명에 육박한다. 그중 25만명은 프랑스에서, 200만명은 스페인에서, 그리고 300만명이 이탈리아에서 건너왔다.


그리고 1898년, 이탈리아 마르케 지방의 벨포르테 델 키안티(Belforte del Chienti) 마을에 살던 18세 청년도 아르헨티나 산타페(Santa Fe, 부에노스 아이레스 북서쪽에 위치한 동네)에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니콜라 카테나(Nicola Catena). 아르헨티나 와인계의 살아있는 전설, 니콜라 카테나 자파타(Nicolas Catena Zapata)의 할아버지다.


필록세라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과학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했고, 지구는 작아졌으며,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미국에만 있어야 했던 진드기가 검은 연기의 증기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 사람들을 절망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대륙으로 건너갔고, 유럽의 농업 기술은 아메리카 대륙을 탈바꿈시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이렇게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느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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