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 모범택시 그리고 로스쿨
과거 사적 복수를 행하는 이들의 결말은 권선징악이었다. 복수의 끝에 합리적인 법적 테두리 안에서 문제를 해결한 이들은 살아남고, 사적 응징을 한 이들은 끝이 나빴다. 이러한 결말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교육했다면, 최근 드라마의 내용 전개와 결말은 분명히 다르다.
1. 법과 법조인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사회에서 드라마는 ‘사적 복수’를 필요악으로 정당화한다. 악을 향한 악이, 개인의 복수를 위한 범법이 통쾌한 건 현실의 법이 악인을 처벌해 복수를 대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드라마는 ‘사적 복수’를 법치주의가 무너진 세상의 ‘필요악’으로 정당화한다. 드라마는 현실의 사건을 드라마에 소환해 법적 허용을 넘어선 철저한 복수로 통쾌함을 선사한다.
2. ‘모범택시’는 국민의 법 감정과 실제 형량 간의 괴리가 컸던 사건,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수많은 피해자를 낳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어 주목을 받았다. 현실과 달리 드라마 속에서 범죄자들은 피 튀기는 복수를 당한다. 논란이 될 만큼 자극적인 묘사와 법의 테두리를 한참 넘어선 복수에도 시청자들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3. 오히려 ‘모범택시’가 사적 복수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는 에피소드로 극의 무게감을 더하자 불만의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 ‘모범택시’에 환호하는 시청자는 ‘사적 복수는 정당한가, 도덕적으로 옳은가’와 같은 드라마의 질문을 원치 않았다. 이는 이미 대부분의 시청자가 ‘모범택시’의 사적 복수는 답답한 현실에서 꿈꿔보는 드라마적 허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청자들은 현실의 법에 항의하고 답답함을 느끼는 건 여전히 우리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정의가 구현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답답한 현실 앞에서도 우리는 사적 복수는 정당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범죄는 여전히 범죄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고민은 복수극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고루하지 않은가….) 사적 복수의 정당성을 고민하는 반복된 갑을론박보다는 더 나아가는 고민이 제시되었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모범택시가 복수가 복수를 낳고 사적 복수를 행한 이들의 끝을 죽음으로 만들었던 원작과 달리 희망적인 엔딩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시청자들의 시청 태도와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법원권근.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운 현실에서 위기에 처한 힘없는 약자에게 법이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모범택시’
4. 악당의 방식으로 악당을 처벌한 드라마 ‘빈센조’는 ‘모범택시’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다만, 판타지적 요소를 더해 드라마의 메시지와 현실적인 딜레마를 건너뛴다. 마피아 변호사라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시작부터 드라마의 오락적 요소를 강조한다. 주변 인물들이 가진 초인적인 능력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판타지적 요소와 코믹함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5. 또한,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두고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현실 사건에 기반하지만, 현실적인 요소는 가볍게 다뤄진다. 빌런으로 등장하는 바벨 그룹의 범법행위와 함께 이들이 처벌을 피하는 과정은 대사와 추측으로 간단하게 묘사되는 것에 비해 장준우 개인의 폭력성은 자극적으로 자세히 묘사하여,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는 빈센조의 복수 방식에 공감하게 이끈다. 극중 초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복수 방식에 앞에서 고민하던 홍차영 변호사가 아버지의 죽음, 피해자들의 죽음 등 폭력적 사건을 겪은 끝에 빈센조의 폭력적인 복수 방식에 동참하듯, 시청자 또한 드라마의 비현실적 요소와 자극적으로 묘사된 폭력 사건 끝에 현실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드라마의 폭력적인 복수를 오락적 요소가 가미된 판타지로 마주한다.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하다. 이걸로는 그 어떤 악당도 이길 수 없다". - ‘빈센조’
6.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운 현실에서 드라마 ‘로스쿨’은 앞서 소개한 두 작품과 다른 행보를 선택한다.
“공정한 저울질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마라” - ‘로스쿨’
7. 로스쿨을 어쩌면 법조인을 향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드라마다. 지극히 현실적인 서사에 이상적인 인물을 대입하여, 완전하지 못한 법은 법을 다루는 이들에 의해 완전히 정의로워질 수 있다는 이상향을 제시한다.
8.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직접 응징이나 사적 복수에 나서는 모습이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건 최근 일"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사법체계에 대한 불만,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과거에는 '법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그리는 법정 드라마 정도로 풀어나갔다면 최근에는 더욱 강한 자극의 드라마로 다루고 있다"라고 했다. 로스쿨은 과거의 방식을 선택했다. 법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법정에서 로스쿨로 장소와 주인공만 달라졌을 뿐 정석적인 법정 드라마로 극이 진행되지만, 법조인이 아닌 예비 법조인을 정면에 내세워 시청자로 하여금 함께 정의로운 법에 대한 고민에 동참하게 만든다.
9. 법은 불완전한 정의다. 새로운 법 조항을 만들고, 기존의 조항을 고치더라도 법을 다루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법은 언제든지 강한자에게 약하고 약한자에게 강해진다. 정의롭지 않는 법에 대한 대중의 분노의 끝에는 법을 다루는 법조인이 있다. 로스쿨은 현실을 향한 분노와 절망감, 무기력함을 넘어 우리가 꿈꿔볼 만한 이상향을 선보였다. 현실의 법이 법을 다루는 정의로운 이들을 만나 완전해지는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10. 로스쿨은 전대미문의 로스쿨 살인사건으로 극이 시작된다. 살해 용의자를 찾는 과정으로 ‘법적 처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서병주는 현실의 법과 정의를 상징한다. 서병주는 과거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을 시작으로 이를 덮기 위해 범죄자와 거래를 하고, 정치인에게 뇌물을 받고, 법을 이용해 처벌을 빠져나간 타락한 법조인이다. 시청자는 한때 존경받던 법조인이던 서병주가 도덕적으로 파멸하여 죽음에 이르렀는지, 주인공과 함께 거슬러 올라간다. 드라마 ‘로스쿨’은 서병주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그의 뇌물 수수, 범죄자와의 거래 타락의 시작이었던 뺑소니 사건을 알아내고, 그 모든 사건에 연루되었던 차기 대권주자 고형수 의원을 법정에 세우며 막을 내린다.
1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병주의 범죄행위 끝에 통쾌함과 동시에 법적처벌의 중요성을 느낀다. “공정한 저울질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자”라고 말하던 서병주는 도덕적 파멸 끝에 “법은 정의롭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가 처음 범죄를 저지르고 빠져나갔던 뺑소니 사건으로 처벌을 받았더라면, 양종훈에 의해 뇌물수수로 처벌을 받았더라면, 그때 그 시점에 법정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더라면, 그에게 법은 여전히 정의로웠을 것이다. 로스쿨은 서병주와 고형수로 대표되는 ‘법꾸라지’ 법조인의 손에서 정의롭지 않게 된 법을, 법조인을 꿈꾸는 로스쿨 학생들이 바꿔 나가는 드라마다.
"법은 불완전한 정의다. 하지만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순간, 그 법은 완전한 정의여야 한다. 법을 배우는 순간, 그 법은 정의여야 한다. 정의가 아닌 법은 가장 잔인한 폭력이니까" - ‘로스쿨’
12. 법을 정의롭게 구현하는 건 언제나 ‘인간’이다. 로스쿨은 잘 알려지지 않은 로스쿨에 대해 알아가는 기획으로 시작한 드라마다. 법과 법조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시청자에게 현실적인 법정 드라마는 외면받기 쉽다. 하지만 웰메이드 법정 드라마가 항상 대중의 선택을 받는다.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이상적인 인물들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로 하여금 ‘정의로워지는 것 같다’는 희망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동시에 우리를 법과 법조인을 비난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 법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주체적인 법조인’으로 참여하게 이끈다. ‘법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서병주가 된 현실의 우리들을 천천히 하나씩 정의로운 법을 믿었던 마음으로 되돌려 놓는다. ‘공정한 저울질’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억울한 사람’이 없을 수 있다고,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결국 ‘법’이라는 희망의 싹을 심어둔다.
리걸 마인드? 애초에 리걸 마인드 따윈 없어, 법률가들 특권 의식이 빚어낸 허상일 뿐이야. 리걸 마인드 운운할 시간에 법전이나 한 줄 더 보지. – ‘로스쿨’
참고기사
분통 터지고 억울한 현실의 대안…드라마 속 '사적 응징'
[Opinion] 대신 복수해드립니다 - 모범택시 [드라마]
"정의롭지 않은 법은 가장 잔인한 폭력" 로스쿨', 6.1%로 종영
JTBC ‘로스쿨’이 남긴 것, 인간의 얼굴을 한 법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