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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Jan 19. 2024

처음엔… 그냥 걸었어

[영화] 와일드

엄마를 잃고 나는 세상을 등졌다.

엄마는 마흔 중반에 암 선고를 받자말자

“내 삶을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데…”라고 했다.


누군가의 누구

무엇을 위한 누구


그렇게 살다가기에는 억울하다고 했다.


가정폭력에 때문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망쳤고

가난에 시달리며 배우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그럼에도 행복에 겨워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을 추던

그녀의 눈물은 아주 낯설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엄마의 간절한 소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먼 곳으로 데려가버렸다.


내 삶은 마치 쌓아올리다 무너진 젠가 같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나무조각들을 보고만 서 있었다.

더 이상 쌓아올릴 이유도, 힘도 없었다.  


나는 나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방탕과 쾌락으로 둘러싸였다.

망가진 내 삶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세상은 내게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용기가 나서,

길을 걷겠다고 마음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가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미국 서부를 끝없이 걷는

PCT(Pacific Crest Trali)에 도전했다.




왜?


왜?…


왜!  


걷자말자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싫었다.


나보다 큰 짐은 나를 짖눌렀다.

겨우 일어서서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내 삶의 무게가 딱 이만큼일까.

살기 위해서 이토록 많은 짐을 업고 살아야 하는 걸까.


다행히 한 걸음을 떼자, 또 한 걸음이 앞으로 나아갔다.

걷는다는 것이 이토록 신비로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무작정 걸었다.

사막을 지났고 눈 위에서 잠을 잤다.

바위에 살이 찢기고 발톱은 뽑혔다.


나를 노려보는 뱀에 놀라고,

한밤중에 들리는 인기척에 소스라쳤다.


사냥꾼들에게 희롱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돕는데

더욱 많은 관심을 가졌다.


4300km의 거리를 100일동안 걸었다.

겉은 후줄근해졌지만,

내 안은 더욱 광채가 났다.

모든 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향한 갈망과

이 길을 끝까지 걷겠다는 의지

그럼으로 인해 생긴 용기였다.


목적지인 신들의 다리에 겨우 도착했다.

그 다리를 건넌 후 내 삶은 더 근사해졌을까?


나는 두 아이를 둔 엄마가 되어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그게 전부다.


그러나 온전한 나로서 꾸린 가정은

이 세상에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석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올바른 방법은

상실로 인한 방황이 아니라

충실로 인한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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