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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May 01. 2024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디즈니 플러스] 쇼군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쇼군>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가 들어서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픽션이다. 일본을 통일했던 태합(전임 왕)이 죽자 찾아온 혼란기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에도의 수장 토라나가의 암투를 런던에서 온 기독교인 블랙손의 시선으로 그린다. 여러 인물들의 심리가 복잡하게 교차되면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일본 특유의 사상과 문화가 철저한 고증으로 표현되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수작이다.

영국 항해사가 본 일본

런던 항해사 블랙손은 표류하다가 일본에 도착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본에 정착한다. 그가 바라본 일본은 무의미한 형식에 얽매여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따라야 할 법도와 규칙은 그에게 낯설었고 비효율적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숨긴채 오로지 주인을 섬겨야 한다는 명분에 매달려 있었다. 그에게도 섬기는 신과 여왕이 있었지만 그에게 대양을 항해할 자유를 허락했다. 하지만 이곳은 모두 고개를 떨꾼채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때 할 뿐이었다. 운명의 안내자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충실한 그들 곁에는 항상 죽음이 있었다. 습하고 흐린 날씨에 지진이 자주 발생했다. 땅이 갈라져 사람들을 집어 삼켰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집을 다시 세우고 일상을 살았다. 그리고 석연찮은 이유로 그들이 모시는 주인 앞에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머리가 잘렸다.

우리는 살고, 죽는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블랙손은 이런 일본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드넓은 바다에 나와 일본까지 오게 된 것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절망 끝에 생을 마감한 자신이 타고 왔던 배의 선장과 이유도 모른채 일본에 억류된 그의 동료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개신교이자 여왕의 지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삶은 언제나 부와 명예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블랙손이 본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어딘가에 홀린 듯 살았다. 주체성이 말살된 삶이었다. 살려고 발버둥치기 위해서 권모술수에 익숙한 그에게는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그 어떤 영광도 내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일본인들은 군주를 위해서 너무나 쉽게 목숨을 내놓았다. 죽기 위해 살았고, 살기 위해서 죽었다. 블랙손의 통역을 맡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마리코는 그런 블랙손의 핀잔에 이렇게 답한다. 삶에도 가치가 있듯이 죽음에도 가치가 있다고.

얼핏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해진다. 내세가 있다는 믿음은 삶을 죽음 이후로 연장한다. 나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삶의 완성이다. 죽음은 끝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항상 강조했다. 나의 죽음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마리코는 불행한 자신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천주교인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군주를 죽인 반역자가 되자 출가했던 그녀는 남편에게 스스로 죽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출가한 여인에게는 남편의 허락 없이, 군주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선택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무사이자 아내를 사랑했던 남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상처를 낫게 하고 다시 그녀와 함께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과 죽음을 허락하지 않은 남편을 등진다.

그녀는 허락되지 않은 죽음 대신에 영어와 포르투칼어를 배우고 신을 섬기며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신과 군주가 동격이었다. 마리코는 자신의 종교가 군주에게 위협이 되자 군주를 택한다. 하지만 그녀는 종교를 버리지 않았다. 현실의 삶은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서양의 지배방식은 이러한 동양인을 개종하여 그들의 곁에 두고 권력을 차지해 현실과 내세의 목표를 하나로 두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천주교를 박해를 했지만 결국 거대한 대포 앞에서 개항을 하고 제국주의 꿈을 꾸게 된다.

삶은 독립적이지 않고 맥락 안에서 정의된다.

블랙손은 토라나가에 의해서 포병대를 꾸리게 된다. 직위를 받고 그에 걸맞는 집과 하인 그리고 아내를 얻는다. 집 안 정원에는 바위를 중심으로 모래가 있고, 모래 위에는 여러겹으로 둥글게 선이 그어져 있다. 돌을 매만지던 정원사가 블랙손에게 말한다. 이 정원에 이 돌이 없다면 그저 이끼가 낀 볼품없는 장소일 뿐일 것이라고. 블랙손은 그 말을 곱씹는다. 그리고 의미 없이 그어진 모래 위의 줄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돌과 모래는 자연 그대로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만, 둘이 함께 그리고 그 모래 안에 선이 들어가는 순간 형용하기 힘든 기운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일본의 와비사비가 아닐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되는 것. 나와 내 주변의 것이 자연스럽고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만드는 공간을 창조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후 시리즈는 토라나가와 그를 견제하는 세력들과의 전쟁이 치닺는 순간까지 그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를 열게한 세키가하라 전쟁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토라나가는 마츠코를 희생시키고, 오랜 벗이자 최측근이었던 사무라이를 죽게 해 불리한 형국을 뒤집고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 결국 승리의 길을 튼다.

그를 배신했던 자가 할복을 하기 전에 자신의 군주인 토라나가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냐고. 토라나가는 그에게 말한다.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람을 읽을 뿐이다고.

같은 것을 보지만 누군가는 다르게 본다. 그저 있는 것일 뿐이었지만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 가에 달라진다. 하나하나의 개체 속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떤 위치에 두고 어떤 관계를 맺게 하였는가에 그 의미가 달라진다. 블랙손도, 토라나가도, 마리코도. 그리고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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