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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성의 찬란한 순간

[영화] 승부

by 랩기표 labkypy

바둑은 내 세대에게 그저 느리고 고요한 보드게임에 불과했다. 흑과 백이 바둑판 위를 채워가며 그리는 모양은 한 폭의 동양화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치열한 수 싸움을 이해하는 이는 드물었다.


빠르고 자극적인 게임이 시대를 장악하던 그 시절, 기원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PC방이 채웠다. 그러나 2015년, 바둑은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국으로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무표정한 인공지능과 달리, 이세돌은 착점 하나하나에 따라 감정이 일렁였고, 그 변화는 모두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인간이 기술의 종속물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피어오르던 그때, 이세돌은 단 한 번의 승리로 ‘신의 한 수’를 남긴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 기계와 겨룬 마지막 찬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승부 이후에도 바둑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이세돌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기보 속에서 더 이상 낭만이 없다고 말하며 은퇴를 택했다.


영화 『승부』는 이세돌 그 이전 세대인 조훈현과 이창호라는 바둑의 거목들이 엮어낸 사제의 서사를 담아낸다. 한국 바둑계 최초로 세계 1위를 차지했던 조훈현은 국수로 칭송받던 자신의 전성기 시절에 어린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이창호는 엄격한 스승의 집에서 함께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서 놀라운 건 이창호가 조훈현의 길을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이 승승장구하며 많은 수를 알려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창호는 조훈현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독자적인 바둑을 만들어냈다.


조훈현은 이런 제자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불현듯 “정답이 없는 것이 바둑의 세계”라고 가르쳤던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순간 조훈현은 오히려 자신이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이미 스승은 제자에게 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속된 승리는 자만을 불러왔고, 과거의 방식이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창호는 그런 스승의 전술을 철저히 분석하고 공부하면서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것이다.


이후 이창호는 처음 출전한 공식 경기에서 스승 조훈현을 꺾고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다. 그 후부터 이창호의 세계가 열렸다. 이창호는 철저한 수비와 계산으로 상대를 유인해 서서히 조여오는 바둑을 두었고, 그렇게 그는 반집 승리라는 희대의 기술로 ‘바둑의 신’으로 불렸다.


영화 속 두 거인의 대결을 통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열어가는 모습을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 엿볼 수 있었고, 또 그 안에 인간의 역사가 모두 담긴 것 같아서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편으로는, 감독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바둑 경기를 관람하던 시절. 한 수에 담긴 철학과 감정을 음미하던 시간은 이제 다시 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은 빠른 반응과 즉각적인 효율이 요구되는 시대다. 느림을 통해 의미를 되새기고, 깊이를 만들어가던 인간의 방식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러한 시대에 영화 『승부』는 사라져가는 순수한 인간 지성의 마지막 빛을 담아낸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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