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쉽게 내뱉는 말 중 하나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체념의 언어이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문처럼 쓰인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걸까.
언어는 생각의 틀이다. 사람은 말을 만들지만, 말 또한 사람을 만든다. ‘운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기회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는 문장은 현실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가능성을 닫는 선언이 된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이의 질에 따라 삶의 질도 바뀔 수 있다. 또한 어휘력을 키우면 상상력의 폭도 확장되며 세상을 다른 무대로 바라보게 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도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박찬욱 감독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아무렇지 않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지, 또 그로 인해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은 너무 흔해져 명사처럼 쓰이는 ‘어쩔수가없다’라고 지었다.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는 제지공장 반장이다. 고졸 출신이지만 밤마다 공부해 방통대를 졸업하고 업계 최고상을 받을 만큼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가족과 함께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다. 더불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출근길은 가볍기만 하다.
그의 인생은 ‘성실하면 이긴다’는 믿음으로 버텨온 여정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냉정했다. 거대한 외국자분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경영상의 이유로 숙련자들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만수도 정리해고 대상이었다. 그는 슬펐지만 곧 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냈지만, 업계 만연한 고용불안은 쉽사리 만수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들조차 같은 처지였기에 경쟁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지경이었다. 오랜 경력자인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어. 어쩔 수 없잖아.” 그 말은 체념의 문이었고, 동시에 파멸의 입구였다.
영화는 만수가 결국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한다며,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어쩔 수 없다’는 말에 갇힌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
만수의 데스노트에 적힌 인물 중 한 명인 범모는 실직 후 술에 의존하며 무너져간다. 자신이 하던 일 외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 변화 앞에서 멈춰 선 인간의 초상이다. 그때 그의 아내 엄혜란이 말한다.
“중요한 건 실직이 아니라, 실직을 대하는 태도라고!”
그 한마디는 영화의 핵심이자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마주하는 태도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인간은 종종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직 한 길만을 고집하며 달려온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유연함이다. 바람을 정면으로 막아내려다 부러지는 나무가 있다면, 물은 그 바람을 피해 흘러간다. 결국 멀리 가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물의 길이다. 삶도 그렇다.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흐르는 법을 아는 것이 진짜 강함이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존재할까? 물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은 있다. 질병, 사고, 자연재해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그 앞의 태도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대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고 묻는 순간, 인간은 다시 주체가 된다.
세상은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 우리가 스스로 가능성을 닫는 순간, 세상은 그만큼 좁아진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어쩔 수 있는 삶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니 다음번에 그 말을 꺼내려 할 때, 이렇게 바꿔보자. 나를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이게 최선인가?”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이고 삶은 다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