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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 Liv Aug 05. 2020

미니멀리즘을 포기했다.

1. 

'아 청소하기 싫다'

3일 전 눈독 들이다가 엄마를 졸라 친정에서 가져온 핑크색 와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마치 그렇게 하면 현실과 나를 조금이나마 단절시킬 수 있는 듯이. 하나 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위인가. 내 신경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해야 할 일 목록에 쏠렸다. 론다 번이 시크릿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 '청소하기 싫다'라는 말로 '청소'를 더 격렬히 끌어당겼던 것이다.


에이 이렇게 누워서 고통받을 바에는 청소를 하고 말지, 이렇게 죄책감의 바구니가 가득 차자 나는 유튜브에 자연스럽게 '미니멀 라이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에 쾌감마저 느껴지는 살림 고수들의 손동작들이 나타나고 아래에는 하얀 고딕체로 쓰인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면서 나를 더 돌아볼 수 있게 되었어요'와 같은 글귀들이 천천히 지나간다.

하얗고 위생적인 병원 같은 공간들을 홀린 듯이 보면서 이렇게 깨끗한 공간에서는 내 마음도 깨끗하게 치유될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을 둘러보니 안 그래도 체리색 몰딩으로 깔끔해 보이기 힘든 공간이 더 봐주기가 힘들다. 아이 장난감이며 책이 뒤죽박죽 굴러다니고 거울에는 언제 튀었는지 모를 얼룩과 먼지가 가득하며 주방에는 비누칠을 기다리는 접시들이 한가득이다. 휴.. 호흡을 고르고 읏챠 일어나 왠지 일하고 싶게 만드는 청바지로 갈아입는다.  


2.

나는 효율적으로 집안일을 하기보다는 한 섹터씩 청소를 완벽히 해두며 중간중간 성취감을 얻는 걸 좋아한다. 안방→ 거실→ 옷방→ 화장실 → 주방의 순으로 가장 하기 싫은 청소를 가장 뒤로 미룬다.


장난감이나 책 같은 물건들을 제자리로 옮기고 자리를 찾을 수 없는 물건들을 우선 책상 위로 다 올려버린 뒤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훔친다. 그렇게 하나하나 청소를 해나가는데 마지막에 뒤돌아보면 렌즈통, 화장품 샘플,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카드 등 잡동사니들이 책상을 꿰차고 있다. 큰일 났다. 미니멀 라이프의 기본은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책상인데! 빠르게 청소를 다 끝내자는 마음에 잡동사니들의 자리는 항상 안방 서랍 속이다.


친오빠에게 일당 3만 원을 쥐어주고 만들었던 이케아 서랍인데 다시금 열어보니 아주 난장판이다. 썩 마음에 들었던 깔끔한 외관과는 다르게 여권이며 면봉, 구르프들이 제 자리를 못 찾고 그냥 누워있을 뿐이다.


모른 척 살포시 서랍을 닫고 인스타에 대청소 끝 하며 반짝반짝한 거실 사진 밑에 #미니멀리스트를 달아 올렸다. 나는 이렇게 깨끗하고 평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슬쩍 드러내며.


3.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했던 지난 2년을 뒤돌아보면 나는 미니멀 카페에 들락거리고 유튜브를 보면서 점점 예민해졌던 것 같다. 집에 들어오면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안 보이게 치우고 조금이라도 삐져나온 게 있으면 각을 세워 정리해두고 서랍 속을 다시 정돈했다.


집안일은 완벽함이란 없는 일이라, 점점 높아지는 기준이 나를 괴롭혔다. 정리를 못하고 자는 날에는 하루의 마무리가 찝찝했고 다음 날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한 곳에 물건을 두지 않는 남편이 짜증 났다. 장난감을 계속 정리해야 하는 아이와의 놀이가 피곤해졌다. 어떤 선물을 받아도 고마운 마음보다는 아 또 짐 받았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원한  아니었다. 나는 미니멀하게 살면서 인생의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싶었을 뿐이다. 근데 결과를 두고 보면 나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집안일에 내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고 있었다. 나의 시간, 에너지, 가족 간의 따스함, 내면의 평화, 쉼 등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미니멀한 삶은 나에게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하는 사람들은 항상 깨끗한 책상과 서랍을 가지고 있었고 베이킹소다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관리하며 하얗고 텅 빈 방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받아들인 기준에 맞춰 몸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그럼에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거슬렸다.


그래서 나는 미니멀리즘의 ‘이미지’를 버렸다. 그리고 내 ‘생각’ 속의 미니멀을 찾았다. 내 머릿속은 누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것보다 ‘나’인 곳이다. 나는 여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처분했으면 하는 것들을 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기게도 거기에는 물건의 양이나 살림의 정도는 내 삶에 중요한 부분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그리 적지도 많지도 않은 물건과 너무 어지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적정한 엔트로피 상태로 바뀌어갔다. 불편하지 않은 선을 스스로 정했고 그건 조금 어지러워도 괜찮다는 '관용'을 베풀기 충분했다. 보이는 모습을 버렸더니 그렇게 찾던 평온과 고요가 찾아들었다.


나는 이제 엉망진창인 내 서랍에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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