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사를 퇴사한 지 딱 1년이 넘었고, 핀란드 헬싱키에서 시작한 석사 과정도 절반이 지나갔다 (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직장인, 유학 갈 수 있을까’ 시리즈 참조). 중간 점검 차원에서 오랜만에 글을 끄적여보기로 한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 뿐만 아니라 핀란드에서 만난 사람들도 종종 궁금해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왜 (하필) 핀란드로 왔는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는가. “ 이 얘기를 시작하려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하지만, 그전에 잠깐, (국가와 전공을 막론하고) 유학 자체가 나의 오랜 꿈이자 로망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밝힌다. 어리석은 로망이라 할지라도 어딘가로 떠나 무언가를 배우는 일을 나는 언제나 동경해 왔다. 그러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석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학업에 대한 장기적 미래를 생각하며 유학을 결정한 것도 내 삶의 문맥에서는 그리 충동적인 일은 아니었다.
일단 무엇을 공부하는가 (혹은 하고 싶은가)에 대하여.
전 직장 이야기를 꺼내 보자. 나는 2019년부터 디지털 광고/마케팅 에이전시에서 약 4년 간 일을 했다. 디지털 미디어를 다루는 일은 생전 처음이었고 예상보다 (몹시) 어려웠다. 회사에 적응하는 데에만 2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적응을 한 뒤에도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디지털도 그렇고 마케팅도 그렇고,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으면서 화려한 언사만 오가는 게 특징이라 직접 연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명확한 답을 (혹은 지도를, 指導)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디지털 미디어’를 검색해서 나오는 책들을 보다가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제목을 발견하고 궁금증이 생겨 책을 구매했다. 리터러시, 즉 Literacy는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다. 언어의 영역에서는 문해력이라고 해석한다. 단순히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넘어 어휘와 문맥을 이해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문해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하면 디지털 미디어의 구조와 현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미디어를 사용할 때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와 이거 좋은데…? 디지털 마케팅을 하면서 품었던 불편한 질문들을 이 개념을 통해 조금 보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질문들이라면?
당시 나의 직함은 정확히 말하면 디지털 미디어 플래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구글, 네이버, 유튜브, 인스타그램 (…) 이런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해서 광고의 전략을 세우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주먹구구식으로 전략을 세울 수는 없다. ‘요즘 유튜브랑 인스타가 대세니까 대충 50:50으로 예산 분배하죠’ 이럴 순 없지 않나. 광고할 제품/서비스의 특성을 파악하고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일 사용자층을 찾는다 (업계에서는 이 행위를 타겟팅 전략이라고 함). 그리고 예상되는 광고 효율 데이터를 기반으로 광고의 목적, 이른바 KPI (Key Performance Indicator)를 세운다. 최대한 많이 보여줄 건지 (브랜딩), 클릭을 유도할 건지 (유입), 그 이상의 구매 활동을 끌어내고 싶은지 (전환), 이 목적들을 적절히 혼합할 것인지 등. 미디어별로 어떤 광고 기능이 있는지 아는 것도 필수다. 구글을 선두로 거의 대부분의 디지털 미디어는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광고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어떻게? 미디어가 보유한 어마어마한 사용자 데이터와 회사의 기술력을 통해서. 그러니 디지털 미디어는 사용자 데이터 활용의 이슈를 늘 불러일으킨다. 내가 불편했던 지점은 사용자들이 이걸 알고 있냐는 거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고. 그래, 사용자 데이터가 미디어에 흘러 들어가는 건 플랫폼 사용료라고 치자. 그걸 상업화하고 기술 개발에 쓰는 것도 그 회사 능력이라고 치자. 근데 사용자들 역시 이런 구조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가? 검색 키워드, 클릭, 스크롤링, 시청, 이탈, 이 모든 행위들이 데이터화되어서 광고 도구로 쓰이고 광고 산업에 팔리는 것에 동의할까? 그럼 광고 시스템은 누가 어떻게 구성하는가? 어떻게 이 사안을 규제하고 교육할 것인가? 사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 이른바 빅테크 업계 내부에서는 이미 꽤 오래전부터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메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관련 문제로 법정에 서는 모습은 지금도 종종 뉴스에서 볼 수 있다. (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 추천)
그 책 저자 중에 출신학교 교수님 한 분을 발견했다. 대학 언론고시반에서 취업 준비하던 시절에 잠시 (정말 아주 잠시) 담당 교수님이셨던 분이었다. 교수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나는 기억하니까 일단 들이대보자. 교수님께 상담을 신청했고 수락해 주셨고 여느 유학원 못지않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의 유학 진로를 상담해 주셨다. 본인도 미국에서 박사 유학을 하셨던 분이라 대체로 미국 학교 입시를 이야기해 주시다가, ‘미디어 리터러시’와 관련해서는 핀란드의 교육 수준이 어나더 레벨이라고 툭 던져 주셨다. 당시에는 ‘설마 핀란드로 유학을 가겠어’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근데 ‘어디로 유학을 갈 것인가’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유학은 단순히 공부를 하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민자로 살아갈 삶의 터전을 찾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민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유학 국가를 살펴본 건 아니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미국이나 영국으로 생각했다가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렇지 않을까), 중간에 썸남 때문에 스위스로 가려다가 (이건 좀 뜬금없는 전개였지…), 이후에 교수님이 말해 준 핀란드도 보기나 봐보자 했던 게 최종 선택이 되었다. 핀란드로 결정하고 나서는 모든 유학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심정적으로도 편안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고 싶어졌다. 국가랑도 궁합이 있는 건가…? 암튼 어디든 붙으면 가기로 결심하고 넣을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에 넣었다. 그래봐야 열 곳 정도였지만. 열심히 준비한 덕분에 가장 가고 싶었던 탐페레대학교와 헬싱키대학교 프로그램에 모두 붙었다. 학교의 분위기와 학업적 네트워크, 그리고 직관적인 판단 (느낌적인 느낌)에 근거하여 헬싱키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전공인데…
내가 붙은 프로그램은 사회과학대학의 Contemporary Societies (직역하면 현대사회). 이 과정은 여섯 개의 세부 전공으로 나뉘어 있고 (Global Development Studies, Social and Cultural Anthropology, Social and Public Policy, Social Data Science, Social Psychology, or Sociology), 지원할 때 본인이 희망하는 전공을 선택한다. 솔직히 학부 때 경제학과 중어중문학을 복수 전공했기 때문에 사회과학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다. Anthropology (인류학) 이건 정말 아닌 거 같고. Psychology (심리학)과 Sociology (사회학)은 관심이 있지만 학부 전공과 거리가 너무 멀다. Data Science (데이터 사이언스), 이건 업무 때문에 좀 추측이 가능했는데 엄청나게 통계, 수학, 기술, 데이터 중심일 것이다. 잘 나가는 분야인 건 알지만 하고 싶은 공부랑은 거리가 멀다. 남은 건 하나, Global Development Studies (한국에서는 ‘국제개발협력학’으로 부르는듯 하다). 이 전공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학과 페이지를 읽어 보니 경제학이랑 어느 정도 연결되면서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것 같다. 어쨌든 뭔가 발전시키는 일이겠지…? 이걸로 가! 나 참, 무식해서 용감했다. 이렇게 무모한 선택으로 석사 전공이 결정되었다. 글로벌 디벨롭먼트 스터디. 디벨롭이라는 말은 회사 다닐 때 종종 쓰던 말이다. 아이디어를 디벨롭 하자는 (좀 더 발전시켜 보자는) 표현으로.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렌다. 신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