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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차 Nov 05. 2023

삶은 예술로 빛난다

나만의 길을 찾는 당신에게

평범에서 비범으로 향하는 길

조원재 작가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생 때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돈을 벌었고, 이후 유럽 전역의 미술관을 돌며 10여 년 동안 예술 작품을 탐구했습니다.


그는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같은 제목으로 펴낸 책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는 예술 분야의 스테디셀러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삶은 예술로 빛난다》는 조원재 작가의 세 번째 저서인데요. 이 책에서 그는 예술을 매개로 삶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전작의 무게 중심이 예술에 있었다면, 신작은 반대로 우리의 삶에 맞닿아 있습니다.”_다산북스 인터뷰


그런데 그가 삶을 주제로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인생과 예술에 대한 그의 관점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진정으로 행하는 것.”_318p


그는 자기다운 삶이 가치 있는 삶이며,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삶은 예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삶과 예술의 공통점이라는 생각입니다. 다음은 피카소의 말인데요. 그는 이 책이 피카소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우리가 어른이 된 후 ‘어떻게 예술가로 남을 것인가’이다.”_8p


지금부터 문제에 답하려는 그의 시도를 따라가보겠습니다. 그 출발은 ‘자기다움’입니다. 저자에게 예술가란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고유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과 그가 남긴 흔적이 모두 예술이 됩니다.


책의 첫 번째 장은 반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당신이 누구든 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저자는 카와라의 ‘오늘’ 연작을 소개합니다. 카와라는 캔버스에 ‘MAR.18,1970’과 같이 그날의 날짜를 그렸습니다. 일 년이나 십 년 정도 지속한 게 아닙니다. 무려 오십여 년 동안 같은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서른네 살 때의 약속을 죽는 날까지 지킨 것입니다.


이어, 이우환 작가의 ‘점으로부터(1975)’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선명한 점에서부터 마지막 흐릿한 점까지 연속적으로 점을 찍은 작품입니다. ‘선으로부터(1977)’ 역시 비슷한 시도인데요. 캔버스의 위에서 아래로 붓을 그은, 선의 연속입니다.


저자는 두 작가의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점은 없다. 똑같은 선은 없다. 똑같은 하루도 없다.’ 그는 ‘일기일회’라는 불교 용어를 빌립니다. “지금 이 순간은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_31p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날, 같은 순간이 없음에도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겹다며 호기심을 잃고 마는 것은 우리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들 말합니다. 갈수록 새로운 경험이 적어지고, 감수성 또한 무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복은 의미를 잃게 합니다.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무서운 지점입니다. 알려진 금언처럼,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는 것이죠. 어릴 적 낯설기만 했던 세상도 나이가 들며 차츰 익숙해집니다. 우리는 얼마 되지 않는 기억을 들고 인생을 걷다, 마침내 ‘없음’으로 돌아갑니다. 소금 한 줌 움켜쥐고 빗속을 걷는 모습입니다.


카와라와 이우환은 삶의 무의미함에 예술로 저항합니다. 또는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를 이어갑니다. 그들에게 예술은 하루하루를 다르게 살게 해주는 하나뿐인 길입니다. 그들은 캔버스 앞에 서서 같은 형태로 다른 선을 그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작품으로 남아 그들의 삶과 철학을 증거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술가가 선을 그으나 마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맞습니다. 영원한 무無로 돌아가고 마는 운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불가능한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작품이란 깊은 우물에 반복해서 던지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기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예술가는 허무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 마나라고 할지라도 ‘하나’를 선택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그러한 태도를 예술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네 가지 방법

자기다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자는 자기다움을 찾는 네 가지 방법을 알려줍니다. 앞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충실하는 삶은 고유한 예술이 된다는 저자의 인생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술가에게 자기다움이란 개성, 즉 자기 작품의 존재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이야기 여정에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와 빈센트가 함께합니다. 


하나, 자기다움은 발견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돌덩이 속에 감춰진 인간의 형상을 드러내는 작업”_52p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의 생각과는 반대입니다. 돌덩이를 깎아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잠재된 형상을 꺼내어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다움은 자기답지 않은 것을 과감히 깎고 잘라냄으로써 발견됩니다. 나이를 먹고도 덕지덕지 달고 사는 욕심들. 어깨가 무겁게 짊어진 책무들. 그는 그 가운데 내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발라내는 뼈아픈 과정을 권하고 있습니다.


둘, 자기다움은 내면에 있습니다. 그는 일기 쓰기와 자화상 그리기가 닮아 있다고 말합니다. 일기는 하루가 아닌 하루를 살아낸 내면의 기록입니다. 예술가의 자화상은 얼굴이 아니라 얼굴에 드러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렘브란트가 각각 20대, 30대, 50대에 그린 자화상을 봅니다. 자신만만한 광채로 빛나는 20대의 표정. 세상을 조금 더 알게 된 자의 내면이 드러나는 30대의 품위. 그리고 두려움과 고집이 함께 드러나는 50대의 흔들리는 눈빛. 세 점의 자화상에서 생生이 다 드러나는 것만 같아 눈을 떼기 어렵습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이 흔치 않았던 시기에 자신을 그렸습니다. 그에게 자화상은 내면의 기록이었습니다. ‘작품의 가치는 작가가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가지는 어떤 참됨에 비례한다(문학평론가 김인환)’는 말이 있죠. 이때 ‘참됨’이란 내면을 직면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삶 앞에서 솔직한 작가만이 관객과 진정으로 소통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작품 활동은 작가 개인에게만 의미 있는 것일까요? 관객은 어째서 작가의 개인적인 시도를 관찰하고 향유할까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봉준호 감독이 언급해 화제가 된 마틴 스콜세지의 사유입니다. 이 말은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까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가 자신에게 충실한 작품은 관객에게도 울림을 전달합니다. 빗대자면 예술가의 역할은 ‘울림통’입니다. 예술가는 세상의 충격을 고유한 진동수로 울려냅니다.


그런데, 공명(resonance)이라고 하죠. 작가의 진동과 관객의 진동이 일치할 때, 작가의 작은 떨림은 함께하는 큰 울림이 됩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우리의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억눌린 감정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셋, 자기다움은 방황에서 얻어집니다. 그는 빈센트의 20대를 ‘번데기의 시기’라고 표현합니다. 빈센트가 점원이었다가, 전도사였다가,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등 자기 일을 찾아 방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에도 다시 번데기로 돌아갔습니다.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찾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화풍을 탐구하고 훈련했죠. 그리고 마침내, 나비가 되어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는 독창적인 예술가로 거듭났습니다. 그가 자기다움을 모색하던 번데기 시절에 그린 그림과 나비가 되어 그린 그림은 차이가 확연합니다.


“시간이 흘러 35세가 되던 1888년, 남국의 태양 빛이 자아내는 강렬한 색채를 직접 보고자 프랑스 남부 아를로 간 그때. 결국, 그는 번데기 껍질을 스스로 찢고 나와 ‘자기만의 고유한 예술을 세계를 창조한’ 화가로서 나비가 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단 3년간 나비로 훨훨 날며 그만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다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그림은 이 시기에 탄생했다.”_81p


마지막,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다움은 자신의 허접함을 견뎌낼 때 완성됩니다.


모든 예술가의 초기 작품은 허접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내가 만든 음식, 내가 쓴 기획안, 내가 그린 그림. 우리는 일터에서 모두 무언가를 만들며 그것이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함에 쉽게 실망합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성장의 열쇠는 노력이 아닙니다. 초라한 내 결과물을 내보이는 용기입니다. 현재의 자신을 드러내며 허접한 시도를 누적하는 과정이 성장을 이끕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 그러나 세잔이 20대에 그린 작품은 비웃음과 구역질, 혹평의 대상이었습니다. 세상이 몰라본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습니다. 자신의 허접함을 견디며, 세잔은 말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단 한 가지 일은 자신이 믿는 바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탐구하고 있다.”_98p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다

인간이 가장 괴로워하는 노동은 무의미한 노동이라고 합니다. 여기 흙을 파서 저기에 쌓았다가, 저기 쌓인 흙을 다시 여기로 옮기는 일을 반복한다고 생각해 보죠. 인간은 몸이 힘든 것은 견뎌도 무의미한 것은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같은 한탄은 의미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보여줍니다. 앞서 살폈듯 죽음은 모든 의미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의미 없는 세상을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한편 예술가는 대상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조원재 작가는 ‘네 개의 시든 해바라기(1887)’에 그려진 빈센트의 해바라기를 예시로 듭니다. 쓰레기통에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줄기가 잘린 채 마르고 시든 네 개의 해바라기 줄기. 여기에서 빈센트는 이글거리는 열정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젊은 날 불덩이같이 타올랐던 자신의 열정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작품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을 겁니다.


또 다른 예는 밀레가 그린 농부의 일상입니다. ‘감자 심는 사람들(1861)’,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1858)’에서 드러난 농부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고 평온합니다. 당시에 농부 또는 농사일이 예술 작품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화가는 없었다고 합니다. 오직 밀레만이 농부의 일상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이죠.


이처럼 뛰어난 예술가는 대상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관찰합니다. 관객 또한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죠. 물론, 이와 같은 해설은 빈센트나 밀레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저자가 작품으로부터 읽어낸(Reading-out) 것이며, 나아가 부여한(Writing-in) 것인데요. 예술에는 정답이 없기에 당신의 감상은 또 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미를 창조해 부여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_131~132p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재능을 타고난 덕에 우리는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으니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거나, 사랑하는 당신이 있기에 내가 살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의 삶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 무의미하게 여기기 십상인 것들에 너무나 희소하고 특별한 의미, 즉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예술의 순간이다._148p


훌륭한 작가는 원래 아름다운 것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미 아름다운 대상에는 작가의 역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소재, 이를테면 돌이나 소쿠리, 바늘 같은 것들이 작가의 마음을 이끕니다. 작가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귀해 보이는 것의 추한 모습을 들추고, 추한 것의 추하지 않은 측면을 드러냅니다.


작가는 대상의 새로운 의미를 작품에 담습니다.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이를 통해 대상은 새로운 시선을 얻고, 작품은 새로운 해석을 얻습니다.


또한, 작품 감상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만납니다. 감상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감정을 표출하고, 작품을 만나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됩니다.


당신은 미술관에 갑니다. 산책하듯 걷다 보니 어떤 작품이 당신에게 윙크를 보냅니다. 그 작품 앞에 발을 멈춥니다. 대화를 시작합니다. 경험을 동원해 의미를 읽어내고, 감정을 쏟아냅니다. 작품과의 씨름을 끝내고 나면 남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작품에서 내가 무엇을 읽어내는가’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도 몰랐던 나의 한 부분에 빛을 비춰준 작품을 당신은 잊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잊히고 말 삶의 한 순간을 결코 잊히지 않을 순간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_174p


감정은 지나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시당합니다. 괴로워도 참고 견디면 그만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어른이 되느라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정교한 마음의 신호이자, 우리 삶의 선택을 이끄는 길잡이입니다.


저자는 인간이 내면의 감정을 분출할 출구를 찾기 위해 예술을 발명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긴 시간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살아오느라 굳어버린, 건조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면서 말이죠. 예술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춰준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검은 그림’ 연작 열네 점이 걸려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의 일입니다. 찌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천둥 같은 감정이 물밀듯 찾아왔습니다. 한순간 이유 모를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샘솟듯 쭉쭉 터져”_194p 나오는 울음이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날의 경험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때 느낀 ‘내면의 기쁨’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느낀 바를 다른 사람에게 말로 다 전달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체험들로 인해 그의 내면은 기름지고 풍요로워졌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술을 통해 그에게 감정의 해방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고야의 작품을 만나기 전의 그와 만나고 난 후의 그는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보다 상쾌한 일은 없다. 바깥의 어떤 지식을 얻어도, 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얼마나 캄캄하고 답답한가.”_176p


독학예찬, 내면의 지도를 따라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그의 예술론과 인생론을 종합합니다. 예술과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결론입니다. 특히나 권위자의 해석에 기대거나, 예술 이론에 의지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방식을 꼬집습니다. 자기만의 관점을 기르라며, 정답을 맞히는 것이 습관이 된 독자의 등을 떠밉니다.


또한 그는 인생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가질 것을 제안합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답하자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생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지 않으면 타인이 답합니다. 나만의 정의가 없으면 타인의 정의에 따라 내 인생을 설계하게 됩니다.


반면 삶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으면 그 정의를 딛고 다음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 어떤 의미를 만들 것인가. 틀린 답은 수정할 수 있으나 내리지 않은 답은 의논할 수조차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전제입니다.


아울러 그는 감수성의 훈련을 요청합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감각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_251p을 발휘하지 않으면 능력이 퇴화하기 때문입니다. 예술 작품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침묵”_252p하며 관객이 설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러나 예술과 달리 우리의 일상은 개인의 느낌까지 결정해주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대로 시청합니다. 자막이 일러주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댓글이 말하는 대로 반응합니다.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그가 권하는 것은 독학입니다. 자신의 사고와 논리, 통찰과 상상을 발휘해 원하는 것을 배우라는 이야기인데요. 스스로 배우고 익힌 무언가는 ‘내 것’이 되어 암기한 지식과 달리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또한 독학은 성장의 기쁨을 주며, 삶을 개성으로 채워줍니다. 작가는 프리다 칼로, 로댕, 칸딘스키 같은 예술가들이 독창적인 기법을 완성한 것도 독학 덕분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독학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앞으로 창조해 나가야 할 ‘자신만의 예술’은 지금껏 다른 누군가가 체계화해 온 예술에는 없기 때문이다.”_311p


위의 문장은 책의 주제를 함축합니다. 임의로 단어를 바꿔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겠습니다. ‘내가 앞으로 창조해 나가야 할 ‘나만의 삶’은 지금껏 다른 누군가가 살아온 역사에는 없다.’ 대행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반드시 직접 해내야 하는 부분까지 남에게 맡기는 것을 경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대학을 휴학하고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유럽 전역의 미술관을 순례하게 된 이야기인데요. 지금의 자신을 만든 ‘찐득찐득한’ 체험이자 일탈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도이터 백팩을 짊어지고, 구형 DSLR을 목에 휘감고 걷고 또 걸으며 수십만 점의 미술작품을 만났습니다. 그 여행에서 작가는 파르 미자니노가 그린 큐피드에 마음을 빼앗기고 에곤 실레의 작품에 전율하며 미술관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앞을 서성였습니다. 


그는 주어진 궤도를 이탈해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한다’라는 단순한 원칙을 따라 지금의 자신을 만든 예술의 자양분을 뼛속까지 흡수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를 때 느낄 수 있는 지극한 기쁨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휴학과 여행이라는 이십대의 긴 방황이 있었기에 예술과 삶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그가 있습니다.


두 발로 직접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한 그때야말로 그가 경험한 최고의 독학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인용된 몬드리안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자기 인생의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당신에게 자부심을 주는 말이기를 바라면서.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설립합니다.”_274p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조원재, 다산초당, 2023.08.29

본 리뷰는 콘텐츠 플랫폼에 기고했던 아티클의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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