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들에게"를 읽고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말이 너른 들판을 실컷 뛰게 해주는 일. 다른 하나는 말이 목마르다는 표현을 할 때 냇가로 데리고 가는 일.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 냇가에 데려가는 것은 우리 일이지만 물을 마시는 것은 말의 자유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들 대신 꿈을 설계해주려는 마음은 월권 인지도 모른다. 과거가 될 어른들이 미래를 살 아이들의 꿈을 설계해주는 것부터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망한 직업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유망하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 의사, 금융업. 20년 뒤 미래엔 직업군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넌 아이 어떻게 키울 거야?"라는 질문에 인생관이나 철학이 아닌 직업으로 대답하는 문화를 조심스레 지적하고 싶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에게 꿈을 찾아주려는 어른들의 노력은 흡사 영업 사원 같다. "아 요즘 손발이 차고 좀 춥네요"라고 말하면 "고객님 그러면 이번에 새로 나온 모피를……" 하고 물건을 파는 영업 사원처럼, 아이는 "엄마 난 과학이 재미있어"라고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을 말하면 "오, 그래. 우리 아들 나중에 과학자 할래?"라고 진로 설정으로 피드백을 하는 모습이 꼭 그렇다. 과학이 재미있다는 호기심은 순수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열정과 호기심을 잔뜩 키워줘야 할 시기에 어른들은 아이에게 너무 빨리 사회를 준비하게 만든다. 이것은 흡사 익지 않은 밤을 억지로 까는 행위와도 같다. 순수한 호기심이 진로의 영역까지 익어가기 위해선 무수한 고민과 과정의 시간이 존재한다. 아이의 열정을 너무 빨리 열으려고 하면 열정은 더 이상 영글지 않는다. 미술을 좋아한다고 재빨리 입시 미술 코스부터 알아본다면 아이는 금방 미술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직업과 진로라는 틀을 벗어나서 단순하게 이 아이는 세상 어떤 것에 끌리고 관심 있어하는 아이일까? 조금 더 순수한 관심을 기울이자. 둘째, 아이에게 순수하게 무언가를 좋아할 시간을 줘야 한다. 곤충이든 공룡이든 직업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 아이는 그것에 관해 배울 준비를 한다고 믿고 시간을 내어줘야 한다.
우리는 늘 아들에게 미안하다. 남들보다 못해줘서 미안하고 시간을 많이 내어주지 못해 미안하다."엄마 우리 가난해서 엄마 일 나가야 돼?" 아이가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에 가슴이 무너진다.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한 날은 미안해서 무언가라도 잔뜩 사주고 싶고 아이가 갖고 싶은 것을 못 사준 날이면 단호하게 말해놓고 가슴이 먹먹하다. 행여 아이에게 소리라도 지른 날은 가만히 누워 자고 있는 천사 같은 아이 얼굴을 보며 반성한다. 내가 이 아이에게 적합한 부모인지, 내가 못해주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늘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못해줘서가 아니라, 과하게 해 주면서 생긴다. 아들은 부모가 물질로 채워주는 만큼 내적 자력을 잃는다.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발전하지 못한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결핍이 결핍되어 있다.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히어로 같은 부모님 슬하에선 나약한 아들이 자란다.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엄마가 있어서 아들은 열심히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을 알지 못하게 된다. 부모님이 온전히 지원해주는 아늑한 비닐하우스에서 공부만 하면 되는 화초 같은 삶은 누군가에겐 부러운 환경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룰 필요가 없는 불행한 삶일 수도 있다. 항상 모든 해결이 가능한 히어로로 남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