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연속면 Dec 31. 2023

그게 불쉿 잡이어서 일을 관뒀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Bullshit Job)』

매거진 ≪무대책 퇴사자의 30일 생존기≫는 무대책 퇴사 후, 커리어 계획 혹은 무계획적 일상에 관해 30일간 쓰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커리어에 관한 명저 『불쉿 잡Bullshit Job』에 따르면 ‘불쉿 잡’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너무나 철저하게 무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
그 직종이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무의미한 직업.


나는 2023년 1분기에 개인적 사유로 2년쯤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몇 달을 쉬다가 오픈된 내 이력서를 보고 연락해 온 어떤 회사에 입사했다. 그 회사는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에이전시로, 고객사에서 돈을 받고 특정 콘텐츠를 제작해 주는 곳이었다. 그런 콘텐츠별로 프로젝트가 수십 개씩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중 두어 개 프로젝트를 맡는 PM이 됐다.


요컨대 그 일은 『불쉿 잡』에서 ‘작업 반장’으로 분류하는 불쉿 잡이었다.

‘작업 반장’은 또다시 1) 사람들에게 업무를 배당하는 일만 하는 사람들(실제로 없어도 전체 작업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 2) 타인에게 불쉿 업무를 만들어 내고 감독하며, 완전히 새로운 불쉿 업무를 만드는 것이 일차적 임무인 불쉿 생성자Bullshit generator 로 나뉜다. 기실 많은 회사에서 ‘매니저’라는 이름이 붙은 대다수 직책이 이런 류의 불쉿 잡이다.


내 직무는 1)과 2)의 속성을 번갈아 가며 띠었으며, 업무의 대부분이 일을 위한 일, 의미 없는 결과물을 더욱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생산하게끔 만드는 작업, 이슈 업이 허용되지 않는 긴 회의, 비협조적인 협업 부서의 인신공격과, 당연하게도 고객사의 갑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회사에 활용 가능한 자원이 거의 없었고 모든 직원이 나와 비슷하게 갈려나갔다. 이런 일을 영원히 주 40시간도 아닌 주 50시간, 주 55시간씩 해 댔고 물론 추가 근무에 대한 수당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동료들이 서로의 이름이나 소속 팀조차 모르는 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낯을 익힐 짬이 않고, 간신히 낯이 좀 익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퇴사해 버렸으니까.


무엇보다 그렇게 해 낸 일의 결과물은 누구에게도 유의미하게 소비되지 않았다. 그저 회사가 고객사로부터 몇천, 몇억의 돈을 받는 대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결과물을 힘들게 만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단 한 사람도 그 결과물로부터 어떤 도움도 얻지 못했다. 그 직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불행해질 사람은 회사 경영진과 고객사에서 또 다른 불쉿 잡에 종사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일에서 의미가 중요하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쓰면 불행해지는 사람이다. 내 고생은 근무 시간에 비하면 최저 시급도 안 나오는 보잘것없는 월급을 받기 위한 것,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식사를 제대로 하는 날조차 거의 없었다. 두 달 동안 체중의 10퍼센트와 정신적 여유를 잃고 회사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일하는데도 아무런 보람도 의미도 재미도 없다’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자원을 정신과와 심리 상담에 투자하다가, 선생님 앞에서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다가 자연히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이 일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겠다고. 회사에 퇴사를 밝힌 날 퇴근길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불쉿 잡』에서 불쉿 잡으로 분류하는 일의 범주는 크게 다섯 가지다. 또한 이 분류가 공존하는 ‘복합적 다중 유형의 불쉿 직업’이라는 것도 있다. 내가 해 온 일들은 대개 3번, 4번, 5번 중 하나였다.


제복 입은 하인: 누군가를 중요하게 보이게 하거나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존재 목적인 직업

깡패: 공격적 요소가 있는 직업의 종사자이나, 결정적으로는 다른 누군가가 채용해야만 존재하는 부류

임시 땜질꾼: 조직에 생긴 균열이나 오류 때문에 존재하는 고용인 (소프트웨어 산업의 개발자들이 종종 자기 일을 이렇게 평가한다고 한다)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어떤 단체에서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고용된 직원들

작업 반장: 사람들에게 업무를 배당하는 일만 하는 사람들, 또는 타인에게 불쉿 업무를 만들어 내고 감독하며, 완전히 새로운 불쉿 업무를 만드는 것이 일차적 임무인 불쉿 생성자


불쉿 직업은 ‘모호함과 강요된 시늉’으로 인해 비참하고, 일하는 자가 스스로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비참하며,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참을 때 비참하고, 자신이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므로 비참하다. 가장 최근 회사뿐 아니라 다양한 회사에서 나는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견디며 고객에게, 혹은 사회에 전혀 쓸모없는 것을 생산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를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마다 나는 퇴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 이력서 경력과 퇴사 사유에는 이 ‘불쉿 잡’이라는 것이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는 셈이다.


회사나 경영진의 관점에서는 “당신이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겠지요” “일을 효율적으로 못 했든가요” “회사에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의 역량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요?” 같은 비난을 가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나는 회사도 경영진도 아니므로 그 비판에는 관심도 귀 기울일 생각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경영진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뻔하지 않나.)

공교로운 사실은, 현대 사회로 올수록 불쉿 직업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그 시스템의 허점을 메우기 위한 불쉿 잡도 늘어난다. 나는 개인적으로 IT 업계의 많은 직무들이 이런 불쉿 잡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그 직군에 대해 가졌을지도 모르는 자부심을 훼손하고 싶지 않으므로 그것에 관해서는 쓰지 않겠다. 어쨌든 ‘불쉿 잡’은 그 일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불행해야 성립되는 것이다.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둔 후 두어 군데에서 면접을 봤는데, 당연히 면접에서는 전 직장 퇴사 사유를 물어봤다. 근무 기간이 너무 짧으니 면접관 입장에서는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불쉿 잡이어서요.”라고 대답할 수 없어 적당히 둘러댄 것이 면접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아직까지 나는 백수다. 대책 없이 회사(대기업도 공기업도 유니콘도 아닌)를 그만둔, 전문직도 기술직도 아닌 경력 단절 직장인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뭘 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이 매거진을 만들어 봤다. (주기적으로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굶어 죽은 것입니다.)


나는 회사보다는 내 생활과 건강을, 직업적 성공보다는 내 개인적 목표 달성을 주로 우선 순위에 두어 왔다. 하여도 15년 가까이 내 삶에서 잠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게 직장 생활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제법 성실한 직장인이었으며 곧잘 일을 괜찮게 한다고 평가받았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어쨌든 지난번 그 회사가 내 마지막 회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위 유망 직종도 아니고, 커리어 수명이 길지도 않은 데다 현재에도 향후에도 좋은 경기가 예상되는 산업은 아닌데 어쩌면 그게 내가 다닌 마지막 회사가 될지도 모른다.


나한테는 날 먹여살릴 사람도 없고 ‘그런데도 그런 이유로 일을 덜컥 관두다니 제정신이냐’라고 펄쩍 뛸 사람도 없다. 장기간 몸을 의탁할 곳도, 변변한 저축도 없고 이제 나이가 들어서 체력도 쇠해 간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생각이라곤 ‘하지만 더 이상 불쉿 잡에 종사하고 싶진 않은데.’ 같은 게 전부다.

그러니까 나의 불행은 현대 사회에서 각광받는 스킬셋이나 역량이 없다는 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직업군에 불쉿 잡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그리고 사회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의 임금이 그토록 낮다는 데 있다.

사진: UnsplashNick Fewing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