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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리 회무침을 하는, 93세 어머니의 불안한 칼질

by 해드림 hd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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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시골에서 지내다가,

“어머니, 저 모레 올라가요.” 하면 대부분 별말씀이 없으시다.

그러면서도 당일 집을 나서며,

“식사 잘 챙기시고요. 상황 봐서 빨리 내려올게요.” 하면

“애미 걱정 말고, 회사 일이나 신경 써라.

비싼 차비 써쌓지 말고.” 하신다.

어머니를 떠나기 전날 저녁에는

미리 순천이나 벌교 시장을 다녀와 조금은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 먹는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자,

술도 한 잔 곁들이면서….

그런데 오늘은 어머니가 문저리(망둥어)회를 무치셨다.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문저리를 꺼냈다.

꽁꽁 얼려있던 문저리를 냉장실에서 풀어놓았지만

완전히 해동된 상태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도마 위에서

반쯤 해동된 문저리를 칼로 탕탕 쳐서 잘게 다졌다.

칼을 내리치는 93세 어머니의 손이 힘들어 보이고 위태로워 보인다.

문저리는 후배인 동생 친구가 마을 앞 개펄 강에서 낚시로 잡았는데

문저리 회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한 달 전 가져온 것이다.

식초를 발라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드시고 싶을 때 해동시켜 회로 드시면 더 맛있다고 하였단다.

지금이야 좀 덜하지만, 마을 앞 개펄 강에는

낚시만 던지면 두 마리씩 딸려오는 게 문저리일 만큼

흔하디 흔한 갯것이었는데

어머니는 이 문저리를 칼로 잘게 다져

된장에 찍어 먹던 맛을 잊지 못한다.


내일은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날,

오늘밤 어머니가 문저리 회무침을 하는 이유다.

어지간하면 아들한테 시켜도 될 터인데

아들을 못 미더워하는 어머니다.

그럼에도 ‘제가 하겠다’라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양념을 챙겨드리는 등

나는 어머니 곁에서 곁꾼(시다바리)만 한다.

곁꾼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호흡하는 일도 좋거니와

어머니가 무언가 주도적으로 하시는 위치를

지켜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위해 요리하는

93세 어머니의 건강한 정신을 느끼곤 한다.

무나 파, 고추를 써는 어머니의 칼질이

더듬거리는 나와는 달리

93세 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다.

수북하게 썰어둔 무채도 가지런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칼질이 항상 불안하다.

손에 힘이 없어 손이라도 베면 어쩌나 싶지만

아직 어머니 칼질이 벗어난 적은 없다.

어머니는 야채를 듬뿍 넣은 회무침 하기를 좋아하신다.

나는 생으로 찍어 먹기를 원하지만

행여 날것을 먹다가 배탈이라도 날까봐

식초로 버무리는 것이다.


93세 노인네의 부엌에는 조리도구뿐만 아니라

지금은 찾기 힘든 커다란 놋그릇이며 사기 밥그릇부터

온갖 그릇이 가득하다.

젊으셨을 때부터 그릇 모으기를 좋아하셨을 뿐만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안성맞춤이 없으면

불편해 하시는 성격 탓이다.

초장을 따라오라 하는데 내가 좀 큰 그릇에 따라오면

바로 퉁바리맞기 일쑤이다.

부엌 싱크대 칼집에도

육고기를 손질할 때 쓰는 칼,

야채를 썰 때 쓰는 칼 등 여러 종류의 칼들이 꽂혀 있다.

칼이 안 들면 지금도 숫돌에서 손수 가신다.

혼자 사시면서도 부엌은 대가족 살림인 셈이다.

어머니가 음식을 할 때 보면

양념을 눈대중으로 하는데

음식 맛은 늘 한결같은 밀도를 유지한다.

어머니는 술을 자주 마시는 내게 늘 지청구를 하면서도

안줏거리 반찬이 있으면 아들 소주잔을 먼저 챙긴다.

문저리 회무침이 있으니 곁들이 반찬은 필요가 없었다.

푸짐한 문저리 회무침을 두고 어머니도 맥주 한 잔을 드셨다.

새콤달콤한 문저리 회무침이 입에서 살살 녹을 만큼 부드러웠다.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며 흡족해 하시던 어머니가 자리를 뜨고서도

나는 혼자 남아 늦도록 소주병을 비운 후,

설거지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가 별들을 바라보았다.

시골집 밤하늘의 별들과도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살아 숨 쉬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곤 하였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저 별들은 또 얼마나 슬프게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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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어머니와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어머니가 방송 출연하며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아들이 있는 줄 알고 방문을 열었는데,

아들의 텅 빈 방을 보고서야 '아, 서울 올라갔구나.' 깨닫게 되면

마음이 허전하시다는 것이다.

대문을 나선 아들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

'가부렀어' 하며 독백처럼 힘없이 내뱉은 말씀도 떠올랐다.


오늘 내가 떠나고 나면 어머니 혼자 식사를 챙겨야 한다.

식사를 챙길 때 덩그러니 남겨질 내 밥그릇이며 숟갈들을 보면

또 허전함을 느끼실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거지를 끝내고 내 숟가락이며 그릇들을 챙겨

찬장 안으로 슬그머니 옮겨두었다.


#93세우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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