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범 교수님은 수필에는 반드시 유머와 위트, 해학이 넘쳐야 수필다운 수필이라고 살아생전 평소 말씀하셨다. 이 말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재미를 잃은 진지함은 독자를 잠재우고, 웃음을 품은 진실만이 마음에 남는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수필은 논문처럼 사실을 증명할 필요도, 소설처럼 거대한 서사를 펼칠 이유도 없다. 대신 일상의 작은 결을 비틀어 위트 있게 바라보고, 삶의 아이러니를 해학으로 풀어낼 때 비로소 독자의 가슴에 가볍고도 오래 남는 울림을 만든다. 결국 유머는 수필의 양념이 아니라, 수필을 수필답게 만드는 생명력 그 자체라는 뜻일 것이다.
이번 임병식 수필가의 해학 수필집 ‘웃음설(設)’은, 만일 서정범 교수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수필은 이래야 한다’라며 높이 평가하셨을 것이다.
한국수필가협회 100인선 24번째로 출간된 임병식의 ‘웃음설’에 실린 몇 작품을 살펴본다.
[산통 깨진 날]
“아무튼 정인이 형이 물 타령하는 바람에 p는 어쩔 수 없이 대접에 받쳐 들고 마당으로 걸어 나오게 되었다. 거기서 나하고도 조우를 해버렸다. 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보이니까 P는 부엌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그 바람에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이 벌겋게 홍당무가 되었다. 그 일은 불길한 예감을 가져왔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해서 나는 교미를 끝낸 암퇘지를 앞세우고 돌아오면서 무안당한 분풀이를 정인이 형에게 마구 해대었다.”
[산통 깨진 날]은 시골 소년의 연정과 돼지 교미라는 지극히 생활적·육체적 장면을 정교하게 교차시키며, 낭패와 수치를 촌철 같은 해학으로 길어 올린 작품이다. ‘산통이 깨진다’라는 표현을 점쟁이의 도구에서 연애의 예감, 인생의 흐트러진 타이밍에까지 확장시키는 비유 감각이 노련하다.
정인이 형이라는 인물은 얄밉고 교활한 머슴이면서도, 전형적인 악인으로 고정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그를 “젊으면서도 인성도 괜찮았던” 사람으로 먼저 소개한 뒤, 시간이 흐르며 자신을 은근히 부려먹는 존재로 변모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 미묘한 관계 변화 속에서 작가는 어린 ‘나’의 분함과 억울함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내가 너무 임의롭게 대해주었던 것이다”라는 식의 자기반성을 끼워 넣어, 서술 전체에서 쓴웃음 섞인 성찰을 부여한다. 유머는 남 탓이 아니라, 결국 자기 몫의 책임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이 태도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정점은, 연애 감정이 막 피어나던 시절의 미숙한 감정이 돼지몰이와 물 한 대접이라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처참히 ‘깨져버리는’ 장면이다. P를 향한 소년의 설렘, 그 설렘이 한순간 홍당무 같은 얼굴과 어색한 눈맞춤으로 변해버리는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피식 웃으면서도 가슴 어딘가가 조금 저릿해지게 한다. 이 수필의 웃음은 단순한 희화가 아니라, 한 시절의 서툰 사랑과 계급·노동의 구조 속에서 흔들리던 어린 자아를 둥글게 감싸는 회한의 미소다. 그래서 [산통 깨진 날]은, 웃음 속에 오래 남는 쓴맛과 온기가 공존하는 ‘수필다운 수필’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생활에 활력을 주는 우스갯소리]
“미처 떨이를 못한 남자 조기 장수가 터벅터벅 산길을 걷고 있었대요. 그런데 보니 한 아주머니가 외진 곳에서 다랑밭을 매고 있더랍니다. 조기 장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수작을 걸기를 '누가 나하고 한 번만 잠자리하면 이 조기 다 줘 버리겠다마는' 하니까, 밭을 매던 그 아주머니가 선뜻 자원을 하드래요." "참 당돌한 여잘세. 그래서?"
[생활에 활력을 주는 우스갯소리]는‘음란’과 ‘유머’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들며, 삶 속의 우스갯소리가 가진 해방의 힘을 변호하는 변론문 같은 수필이다.
과거 문학 작품이 음란성 논란에 휩싸였던 사례를 상기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일상의 자잘한 언어유희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사회적 규범과 웃음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품위 있게 짚어낸다. “삼겹살에는 비계가 들어가기 마련”이라는 비유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언어 표현에 완전한 ‘순도’란 있을 수 없음을, 웃음 어린 현실 인식으로 드러낸다.
이 수필의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장면들은, 언어가 가진 다의성과 인간의 ‘음탕한 청각’을 유머러스하게 폭로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에피소드를 단순한 야한 농담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피차 별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라는 문장으로, 이 우스갯소리들이 공동체 내에서 긴장을 풀고 삶의 활력을 주는 ‘조미료’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유머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고단함을 어루만지는 소박한 치유의 도구로 승화된다.
특히 작품 후반부, 산행길·정자나무 밑 술자리에서 우연히 들은 유머를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곱씹으며 “끝 간 데 없이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화자의 모습은, 이 수필의 정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살이의 아이러니와 불합리가 머피의 법칙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작가는 허를 찌르는 한 줄의 농담이 “이마의 주름살을 펴게 만드는” 값진 경험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야하고 가벼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 존재의 피로를 달래는 지극히 진지한 웃음의 미학을 담아낸 작품이다.
[오지에서 생긴 일]
“선상님, 누가 더 촌놈인지 보실랍니껴?
박주사님. 얼마 전에 박 주사님 고향에서 버스 개통식이 있었지랍?" 하고 묻고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다.
"그 마을이 숭헉 헌 촌 아닙니까. 읍내를 한번 나가려면 하루가 다 걸리는 곳이지요. 그런디 마을버스가 개통된다니 얼마나 좋아 했겠어요. 한디, 노처녀 시집간 날 등창난다고 개통식 날 하필 버스가 고장이 났다네요.”
모두 뒷말이 궁금해하는 눈치다.
“그란디 밤중에야 버스가 도착하게 됐다네요. 기사양반이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들고서 웅성거리고 있더랍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오자 호랑이가 불을 켜고 내려온다고 그러고 있더랍니다. 버스 한번 구경 못 한 사람들이 버스 전조등 불을 보고 호랑이가 불을 켜고 오는 것으로 착각을 한 거지요.”
[오지에서 생긴 일]은 ‘누가 더 촌놈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언어의 공방전을 통해, 도시와 오지,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을 통렬하게 비틀어버리는 수필이다.
외딴 섬의 누추한 간이주점에서 시작된 소소한 술자리는, 곧 서로의 고향을 향한 ‘촌놈 놀리기’ 대결로 번지고, 작가는 이를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록한다. “누가 더 촌놈인지 보실랍니껴?”라는 한마디는, 우월감을 자처하던 도시인에게 되돌려지는 예리한 질문이자, 독자에게 던지는 역설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과장과 허풍의 색채를 띠면서도, 농촌·어촌 공동체의 정서와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ㄱ자 손전등을 ‘불이 난 줄 알고’ 구정물에 던져 넣는 장면, 서울동물원에서 소변을 보며 엉금엉금 걸어가는 부녀자, 버스를 처음 본 사람들이 전조등을 보고 ‘호랑이가 불을 켜고 내려온다’고 오해하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폭소를 유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공간과 사람들의 실상을 드러낸다. 웃음과 동정, 우스꽝스러움과 애잔함이 동시에 배어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내가 태어난 고향 또한 오지이기는 오십 보 백보인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자신 역시 그 웃음거리의 일부임을 담담히 인정한다.
늑대와 여우가 출몰하던 유년의 기억, 대나무 막대를 들고 늑대를 경계하며 등하교하던 풍경은, 도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지’와는 전혀 다른 감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자기 폭로적 결말 덕분에, 수필의 웃음은 누군가를 낮추는 조롱이 아니라, 모두를 포함하는 따뜻한 자조로 변모한다. [오지에서 생긴 일]은, 결국 ‘촌스러움’이란 타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얼굴 중 하나임을 유머로 환기하는, 세련된 해학의 결정체다.
[웃은 이유의 변(辨)]
“백내장 수술을 한 것이 마치 봄철 숭어가 겨우내 낀 백태를 벗고 활발해진 행동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기민한 대처로 용케 들키지는 않았지만 대신 혓바닥이 얼얼하도록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나, 그렇긴 했어도 ‘초가삼간 다 태워도 빈대 죽는 것만 시원하다’는 말이 있듯이 비록 상처를 입긴 했어도 웃는 걸 들키지 않은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이 수필은 지인의 백내장 수술을 계기로,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기이한 연상 작용을 통해 웃음을 생성하는지 정교하게 분석하는 ‘자기 해명서’다. 백내장과 숭어의 눈에 낀 백태를 연결하는 비유는 자칫 불경하거나 엉뚱해 보일 수 있는 발상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상상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웃음의 윤리적 경계와 심리적 메커니즘을 동시에 탐구한다. 혀를 깨물어가며 웃음을 참는 장면은 우스운 동시에,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 내면의 긴장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숭어의 백태가 벗겨지는 계절적 변화와 잡히기 쉬운 시기·잡히기 어려운 시기에 대한 설명은, 자연 관찰 기록이자 유머의 정밀한 사전 작업처럼 배치된다. 이 생태적 묘사는 단순한 농담의 장식을 넘어, 시력이 회복된 지인이 앞으로 “환히 개안이 된 눈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라는 기대와 겹쳐진다. 숭어의 민첩해진 움직임과 지인의 새로워진 시야가 겹쳐지면서, 웃음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은근한 축복과 기쁨의 표현으로 전환된다.
작가는 굳이 “웃은 이유의 변(辨)”을 길게 늘어놓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웃음에도 설명과 맥락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통화 중 잠시의 침묵이 혹여 비웃음으로 오해받을까 염려하는 마음, 그 오해를 미리 예방하고자 글로 풀어 쓰는 태도에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섬세한 배려가 깔려 있다. 이 작품의 유머는 타인을 희생시키는 비열한 웃음이 아니라, 자신의 엉뚱한 상상력을 먼저 드러내고 스스로 조소하는 방식으로 성립한다. 그래서 이 수필은 사소한 연상을 고급스러운 사유로 끌어올리는, 품위 있는 해학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형량계산(刑量計算) – 사투리 버전]
“‘법 미꾸리지, 형량 계산기’라고 어느 정치가가 한 말인디요. 우리나라 요직은 안 거친 데가 없는 어느 고관대작을 두고 한 말이랍디다. 고개가 끄떡 거려지는디 무담시 나만 그럴까요. ‘법꾸라지, 법꾸라지’ 그 말이 참 잼있어서 몇 번을 되새겨 봤네요.
아, 그런디 문득 어떤 야그가 떠오리지 않는갑이요. 다름이 아니라, 영판 우스운디 한번 들어 보실라우.
스무해 전에 쬐간한 섬에서 일어난 일이랍디다. 섬이 작다 보니 뉘 집에 숟구락이 몇 개이고 도야지 상고달이 언제인지, 한 식구맹키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인디요. 하-, 우서운 일이 일어났다네요.”
사투리 버전의 [형량계산]은 사투리라는 언어적 질감을 전면에 내세워, 거대 정치·사법 담론의 풍경을 촌로의 우화 한 편으로 능숙하게 전환시키는 수필이다. “법 미꾸리지, 형량 계산기”라는 표현에서 이미 알 수 있듯, 작가는 현실 정치와 사법 권력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대신, 사투리 화법 속에 녹여낸 해학으로 우회한다. 진지한 비판과 쓴웃음이 공존하는 이 이중구조 덕분에, 글은 무겁지 않으면서도 날카롭다.
섬 마을에서 벌어진 개와 닭, 그리고 배상 책임의 주체를 둘러싼 해프닝은, 형량 계산의 ‘논리’와 현실의 ‘도덕’이 얼마나 쉽게 어긋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개 값과 닭 값을 재빨리 셈하여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딸의 ‘계산’은, 오늘날 권력자들이 벌이는 법리 공방의 축소판처럼 읽힌다. 그러나 끝내 wagging tail(꼬리를 흔드는 개)의 무구한 몸짓이 증거가 되어버리며, 치밀한 계산은 우스꽝스럽게 무너진다. 이 반전은 통쾌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진실 앞에서의 인간적 허술함을 드러내는 풍자의 힘을 지닌다.
[해구신(海狗腎) 이야기]
“어느 날 시집간 딸이 친정집을 방문해보니 처마에 전에 없던 웬 짐승 내장 같은 흉측한 것이 내걸려있었다. 영문을 모른 딸이 그걸 보고서 친정엄마에게 물었다. 저게 뭐예요? 해구신이라고 하는디, 니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는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고 간수를 한다. 어엉?
그 말을 들은 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집에 돌아와서 없어진 것을 확인한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내며 아내를 닦달했다.”
[해구신 이야기]는 남성성, 성적 욕망, 민간요법, 풍문과 소문이 뒤엉킨 ‘통속의 세계’를 한껏 끌어올리면서도, 끝내는 삶을 지탱하는 웃음의 힘을 옹호하는 수필이다. ‘해구신’이라는 다소 민망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작가는 저속함에 빠지지 않고, 고상함과 통속함 사이의 긴장을 유머로 해소한다. “고상한 것을 꿈꾸지만 통속한 생각도 떨치지 못한다”는 문장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 이해의 핵심 축이다.
임금·이조판서·강원목사·속초현감·어부로 이어지는 ‘금박지-진품-가짜’의 연쇄는, 권력 구조 속에서 어떻게 본질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상층부로 전달되는지를 풍자하는 우화로 읽힌다. 맨 아래의 어부만 진짜 해구신을 보고 만지며 수고를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가짜가 금박지에 싸여 윗사람의 몫이 되는 구조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연상시키며 씁쓸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작가는 무거운 고발이 아니라, 능청스럽고 너스레 가득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예비군 중대장의 과장된 ‘능력’에 관한 에피소드, 시집간 딸이 아버지의 해구신을 몰래 가져가는 장면 등은, 민담과 야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살아 있는 구전 서사의 맛을 전한다. 이 이야기들은 사람의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지만, 결코 음습하지 않다. 오히려 “구경하는 제3자로서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듯, 작가는 독자를 편안한 관객의 자리로 이끌어, 함께 웃고 상상하고 수군거리는 공모의 공간을 만든다. 끝 문장에서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잠시나마 근심을 잊게 한다”는 결론에 이르면, 이 작품은 단순한 야담 모음이 아니라, 통속성을 통해 오히려 삶을 견디게 하는 웃음의 존엄을 옹호하는 수필로 자리매김한다.
[사랑방에서 주워들은 익살]
“귓때기에 아직 피 안 마른 아그들은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한 나는 노골적으로 배척을 당하면서도 부득부득 눌러앉아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대 반전이 일어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땡추가 방문을 열고 후닥닥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사랑방에서 주워 들은 익살]은 ‘이야기의 힘’과 ‘입담의 전승’을 주제로 한 자전적 수필이자, 한국적 사랑방 문화에 대한 우아한 헌사다. 어린 시절, “피 안 마른 아그들은 가라”는 핀잔에도 사랑방을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훔쳐 들었던 화자의 기억은, 훗날 작가가 되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케 하는 장면처럼 읽힌다. 사랑방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음담패설과 민담, 곤조와 풍자가 뒤엉킨 서사의 학교였고, 화자는 그곳에서 언어의 맛과 이야깃거리의 구조를 저축해온 셈이다.
이 수필의 진정한 묘미는, 음담패설의 세계를 야한 농담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이야기’라는 형식의 완성도와 전승의 과정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화자는 “내 글 중에 양념으로 첨가한 우스개 이야기는 거의 당시 얻어들은 이야기”라고 고백하며, 사랑방에서 축적된 말들이 어떻게 이후의 창작에 창고 역할을 했는지 밝힌다. 결국 [사랑방에서 주워들은 익살]은, 한 편의 야담을 들려주는 동시에, 작가가 되기까지의 자기 형성 과정을 유머로 풀어놓은 메타 수필이다. 웃음과 서사, 삶과 글쓰기의 근원이 촌스러운 사랑방 구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고백이, 작품을 한층 더 깊고 고급스럽게 한다.
촌평을 마치며
『웃음설』에서 보여주는 임병식의 수필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일상의 비루함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결코 천박한 저속함으로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는 통속성과 고상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감각을 지녔고, 유머를 통해 인간의 허술한 본성을 가볍게 조롱하면서도 따뜻한 이해와 공감을 부여한다. 그의 작품 속 웃음은 남을 희생시키는 조소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향한 너른 웃음이며, 그 안에는 삶을 견디게 하는 치유와 해학의 힘이 깃들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임병식의 유머는 단순한 농담을 넘어, 생의 모순을 스스로 식별하게 하는 사유의 도구로 승화된다.
또한, 그는 풍부한 구전 문화의 계보를 현대 수필 속으로 끌어와 문학적 양식으로 정제해낸다. 사랑방에서 건져 올린 야담, 오지에서 목격한 우화, 농사·연애·성(性)·권력에 얽힌 촌스런 일화들은, 그의 필치 안에서 품격 있는 문학적 질감으로 변모한다. 임병식의 수필은 ‘낮은 언어’를 통해 ‘높은 문학’을 구현하는 보기 드문 사례이며, 서민적 삶 속에 숨은 해학의 정수를 포착해 낸 문장들이 그 가치를 증명한다. 삶의 상처와 우스꽝스러움, 욕망과 어리석음을 한데 아우르는 그의 글은, 결국 인간다운 품격과 웃음의 미학을 오늘의 수필 문학 속에 당당히 복원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