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 '추억'과 '장소'
*원래 다른 글을 쓰려고 했는데 갑작스레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잠시 미루게 됐다. 낭만에 대해서도 논하려 했으나 그 얘기까지 가기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음에 마저 쓰기로 했다.
나는 대학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정착민 중 한 명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내가 다니는 대학의 대학가가 제2의 고향 비슷하게 됐다. 실제로 성인 되기 전까지 살던 고향 말고는 서울의 이 동네(딱히 동네 이름을 밝히진 않겠다. 어디 사는지, 대학교를 어디 나왔는지 한꺼번에 알 수 있는 곳이라)가 내가 가장 오래 산 곳이다. 제대하고 자취방을 구한 이후에는 한 번도 이사한 적 없이 같은 곳에서 계속 살고 있다. 고향집도 내가 없는 사이에 여러 번의 이사를 거쳤는데. 그러니까 지금 살고 있는 내 방이 현재의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고, 머무르고 있는 공간이라는 얘기다.
사실 이 동네는 과 새내기 모임 때문에 입학하기 직전에 처음 와봤다. 그때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서울의 친척집에 살면서 강남 부근 재수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이 동네는 그에 비해 아주 소박한 동네였기 때문에... 나름 서울의 중심 부근에 있는 곳인데 이렇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숙사에 살게 되고 하면서 오히려 이 덜 번잡함과 안정감에 정이 들게 됐다. 특히 내가 제대 후에 대학교에 학을 떼고 바깥으로 나돌았기 때문에 더더욱. 난 고양이과에 가까운 예민한 영역 동물이라 일상의 안정감을 좋아한다. 데이트나 무슨 활동 같은 거 외에는 매번 비슷한 데서 밥을 먹고 낯익은 곳을 가는 게 좋다. 또,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돌아갈,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이 동네 자체는 내가 처음 입학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정말 많이 변했다. 동네가 예전부터 재개발 구역이기도 했고. 외형 자체가 변해서 언덕을 다 엎고 아파트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슬픈 건 외형은 비슷하게 유지되면서 그 내용이 변하는 것이다.
오늘, 그것도 방금 거리를 나섰다가 이 동네의 마지막 남은 내 '단골'집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내가 자주 가던 식당, 술집이 없어지고 '단골'이라 칭하던 곳도 없어져 가던 와중에 내 마지막 보루였던 장소다. 원래 방학 중에는 쉬는 곳인데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영업이 계속 미뤄지다 결국 제대로 된 작별도 없이 보내게 됐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슬프거나 하기보다는 얼떨떨한 기분만 든다.
영화는 어떤 '장소'에 '인물'이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인물'보다 '장소'가 먼저 있어야 한다. 추억이란 것도 비슷하다. 그 '장소'에 내가 들어감으로써 추억이 생기는 거고, 그 추억을 지탱하는 가장 큰 요소는 '장소'의 존재 여부다. 이제는 이 동네를 추억하려면 사진이나 영상을 찾아봐야 한다. 추억의 장소들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했고, 어렸고, 나였던 공간이. 이런 감정은 더 나이가 들어서 느끼고 싶은데. 변화가 빠른 세상이라 이런 것도 더 빨리 겪게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