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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May 06. 2020

죽음의 무게

20.05.05. 그냥 쓰기

*정치적인 글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내가 뭐 어쩔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니까. 그런데 그 정치가 이 정치는 아니지 않나?

*다만 너무 냉소적이고 비인간적이어서 쓰다가 많은 부분을 지웠다. 이 글도 곧 지울 것 같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이 죽게 되면 오시리스 신(神)의 재판을 거치게 된다고 믿었다. 이 법정에서는 망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서 무게를 잰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였던 심장을 통해 죽은 자의 생전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 심장이 반대편에 올려진 마트 여신의 깃털보다 무거우면 망자는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된고, 심장이 깃털과 수평을 이루게 되면 망자에게 영생이 부여된다.

 이 신화에선 심장, 즉 영혼의 무게가 말 그대로 깃털만큼 가벼워야 한다. 이러한 개념은 불교의 무소유 개념이나 기독교에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며 베풂을 강조하는 것 등 '가벼운 마음' 개념과 어찌 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아니면 나의 억지 끼워 맞추기다(아무래도 이 쪽이 더 가까운 것 같다. 쓰면서도 억지라고 생각했다).


 영혼은 가벼워야 하지만 죽음의 무게는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그 무게를 저울에 대고 무언가와 비교할 수 없다. 절대로.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배우고, 겉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죽음의 무게는 다른 많은 것처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남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나보다 힘든 상황에 쳐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것처럼, 전혀 모르는 오지에서 수백만이 죽는 것보다 내 주위 사람 한 명이 죽는 것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뭐 언론과 정치에선 공공연하게 이 무게가 천지차이로 다르다. 밀리그램부터 톤 단위까지. 사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또 아무리 이성적이니(동성‧이성할 때 그 이성 말고) 어쩌고 해도 이성은 감성을 못 이긴다(만약에 감성이 진다면 그건 덜 감성적이거나 작위적이어서 그렇다). 유럽에서 난민 수용 찬반론이 한창일 때, 해안에서 발견된 난민 어린이의 시체 사진으로 모든 여론이 뒤집혔듯이. 그 전에도 수많은 난민이 죽었는데도 말이다.


 오늘은 유독 글이 더 두서가 없다. 사실 얘기를 꺼내는 게 조심스럽다. 특히 이런 거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건은 더 주목을 받고 화두에 올라야 한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실검에 계속 오르고 뉴스나 신문에서도 계속 보도 중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더 필요하다. 전시적인 보도들은 빼고. 코로나 이슈가 끝난 게 아니지만 사망자가 많이 나온 대규모 참사에, 어느 쪽으로 봐도 심각한 인재(人災)인데 관심이 덜한 것 같다. 일단 나부터도. 강남 클럽에서 화재가 났어도 지금보다 관심이 컸을 거다.

 영화 <염력>이 망했을 때, 나는 그 (수많은)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평범하고 인간적이고 친근한 히어로를 원하지만 매일 길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칠 것 같은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범하고 인간적이고 친근하고 '영화적인' 히어로를 원한다. 어쩌다가 초능력을 가진 평범한 배 나온 아재가 메인인 영화 말고(물론 이와 관련해 더 많은 부연설명이 필요하긴 하다),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다.

 <염력> 얘기를 한 건 이 말을 하고 싶어서다. 이건 영화가 아니지 않냐. 청년이건, 중년이건 일용직 근로자들은 사회적 약자다. 그들이 '적당히' 가난해서, 정규‧비정규직 프레임이 아니어서, 어린이‧학생‧노인‧여성이 아니어서, 총선이 끝나서 관심이 덜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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