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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Dec 27. 2020

조용하고 강한 진동으로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

타마라 젠킨스, <프라이빗 라이프>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문예창작부라는 교내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4명으로 시작했던 우리 기수는 2명이 전학을 가서 나와 그녀만 남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아리의 간부 -회장, 부회장-가 되어 동아리의 대소사를 함께 짊어지면서 더 친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 이상을 가까운 사이로 지냈고, 서로의 일상을 자주 공유하고 힘든 이야기도, 기쁜 이야기도 함께 나누며 돈독하게 지내고 있다.

그녀는 순수문학의 길을 선택해서 신춘문예에 등단도 하고 현재 2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권위 있는 문학상도 받은 인정받는 시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밋밋한 문장으로 그녀의 삶을 단순화하고 평면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한 문장 뒤에 감춰져 있는 수없는 우울과 고독의 시간을 그녀는 견뎌내 왔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그 한 줄 한 줄을 쓸 때마다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을지가 온전히 읽는 이에게 전달되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의 시를 다 읽기 전에 내가 먼저 몸져눕겠다고 말하곤 했다(실제로 눕기도 했다).

그녀의 시에는 그녀의 삶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무겁기도 하고 적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코 어둡거나 비관적이지 않았다.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희미한 빛이 있었다. 모든 사람을 빛 가운데로 드러나게 하는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라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가장 간절하고 가장 절실한, 그것을 간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부드럽고 뿌연 밝음과 긍정이 있었다. 그 빛은 쟁취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의지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부단한 열심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 그저 주어지는 것. 그렇다고 마냥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사람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매일매일의 어떤 일상에 주어진 환경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에게, 그가 속한 터널은 그 자신의 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통과할 수 있도록 희미한 빛을 허용함으로써.

그녀와 나는 원래도 친했지만 난임이라는 공통된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을 한 단계 더 깊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병원, 같은 의사 선생님에게 시술을 받았고, 여러 가지 정보를 공유했으며, 시술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자조적으로 나누며 웃음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그녀와 내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먼저 난임을 진단받았고, 훨씬 더 오래 그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는 점이다. 시를 생산하기도 고통스러운 와중에 그녀는 아기를 생산하는 고통까지 안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통계(2020.10.19.)에 따르면 난임 진단자는 2017년에 208,704명, 2018년에 229,406명, 2019년에 230,802명으로 매년 5%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난임의 원인은 평균적으로 남성에게 40%, 여성에게 40%, 10~20%는 기타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고된다. 이러한 난임을 극복하기 위한 보조적인 시술로는 과배란 유도, 인공 수정, 시험관 시술 등이 있다. 과배란 유도는 한 달에 한번, 여성의 난소에서 배출되는 1개의 성숙 난자 외에 다수의 미성숙 난자를 성숙시켜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는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고, 인공 수정은 정자를 배란기에 자궁 속으로 직접 주입하는 시술이다. 시험관 시술은 체외 수정 시술이라고 해서, 정자와 난자를 채취하여 시험관 안에서 수정을 시킨 뒤, 수정란을 다시 자궁 속으로 이식하는 시술이다. 그녀와 내가 받은 시술이 바로 이 시험관 시술이었다.

2018년에 이 시험관 시술과 난임 부부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굉장히 코믹하게 그려낸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개봉했는데, 타마라 젠킨스의 <프라이빗 라이프>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시험관 시술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공감되지도, 코믹하지도 않을 영화이나, 나와 같은 유경험자에게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푸시시- 웃음이 새어 나오는 영화이다. 찾아보니 감독인 타마라 젠킨스가 실제로 난임 시술을 받았기 때문에 난임시술 과정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난임 부부의 심리적인 변화를 잘 묘사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의 배경은 미국이고 저들은 미국인인데도 난임은 국경을 초월하는지 그들이 내뱉는 대사나 행동 하나하나가 소름 끼치게 우리와 흡사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주의: 아래 내용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제목은 <프라이빗 라이프>이지만 시종일관 레이첼과 리처드는 자신들의 가장 사적인 부분들을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거나 폭로당해진다. 예를 들어,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고 있어서 여러 호르몬 주사와 약들을 복용하고 난자 채취를 앞둔 레이첼이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서 술을 권하는 친구에게 시술 준비 중이라 마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겸연쩍게 말하는 장면이나, 아기를 입양하기 위해 사회복지사와 미팅하는 와중에 입양을 결심하기 전에 난임 치료를 받았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리처드의 고환이 한 개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리처드의 의붓 조카 셰이디가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모인 추수감사절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난자를 레이첼-리처드 부부에게 기증해서 그들의 불임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렇다. 레이첼과 리처드에게 난자를 기증하기로 결심한 이십 대의 세이디도 예외는 아닌데, 그녀는 그녀의 난자 개수가 나이에 비해 많이 생성되지 않았다는 굴욕적인 얘기들을 의사에게 가감 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 외에도 난임 시술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들의 가장 프라이빗한 부분들은 사람들에게 난데없이 폭로된다. 난자의 상태, 정자의 상태, 고환의 상태, 자궁의 상태, 질의 상태 등등. 겪어보니 난임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난임 부부들의 임신 도전기는 항상 외부의 사람들에게 좋은 가십거리가 되어 준다. 그렇게 임신이 안되는데 왜 억지로 하려고 하는 거지? 돈과 시간을 모두 버리는 짓을 왜 하는 거지? 그 정도 했으면 포기하고 무자녀로 살든가 입양을 하면 되지 않나? 등등. 리처드의 형수 신시아 역시 자신의 남편 찰리가 동생 리처드의 시술 비용을 또 빌려주려고 하는 모습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잔인한 말로 내뱉는다.(신시아가 추수감사절을 챙기며 하나님께 감사한 일들을 고백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안 비밀이다.)

사실 신시아의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포기할 건 해야지."라는 말은 아마도 난임 부부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내뱉지 않지만 속으로 품고 있는 대표적인 생각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난임 시술 비용이 1회당 100만 원을 넘지 않지만 영화에서 본 미국의 현실은 10,000달러, 한화로 1000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 그렇다면 더더욱 위와 같은 생각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요즘에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자 연예인들의 난임이 TV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시험관 시술을 10회 이상 시도했는데도 아기가 생기지 않은 사연 등이 기사화되곤 한다. 같은 시술을 해 본 나로서도 '어떻게 열 번이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 이렇게까지 해서 아기를 가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현생 인류가 출현한 후 20만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기를 낳고 종족을 번식시켜 온 역사가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유전자의 이기성 때문에 우리는 납득하기 쉬운 이유 없이 그저 유전자의 욕망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이렇게 임신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까? 왜 아기를 가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에서 리처드와 레이첼이, 그리고 나중에는 난자를 기증하려는 세이디까지, 보여주는 모습은 굉장히 기계적이고 공상과학영화의 장면 같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영양제와 호르몬제를 먹고, 정해진 시간에 주사를 척척척 꺼내서 배에 놓고 엉덩이에 놓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질 내 초음파를 본다. 이미 이 사이클에 참여하기로 당사자들이 합의를 한 이상, 그들은 주어진 '할 일이나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유나 명분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시작하기로 했으면 군말 없이 프로세스에 잘 따르는 것. 그게 전부이다.

하지만 레이첼과 리처드의 난임 극복기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라기보단 엉망진창이다. 난임치료가 잘 안돼서 입양을 고려했지만 첫 번째 입양을 신청한 미혼모가 사실은 그들을 속인 사기꾼이었음이 밝혀졌고, 다시 시작한 시술에도 실패하고, 난자를 기증받으려고 했던 일련의 노력들도 기증자인 세이디가 쓰러지는 바람에 엉망의 연속이다. 겨우겨우 세이디의 난자와 리처드의 정자를 수정한 배아를 이식했지만 그것도 실패. 비탄에 빠진 레이첼에게 리처드는 차라리 안 된 게 다행이라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다시 섹스를 할 수 있을까?'라는, 맥락도 눈치도 사라진 소리나 한다.

난임이 힘든 것은 주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인공적인 시술로 인한 신체적인 변화도 있겠지만 거듭되는 실패에서 오는 관계의 악화일로 때문이다. 실패가 주는 무력감은 스스로를 자책하는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더 나아가 상대방을 비난하는 화살이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리처드는 당사자인 '우리' 둘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임신에 집중하기보다 글을 쓰고, 책을 펴내고, 일을 중단하지 않았던 레이첼을 겨냥한다. 그 말에 레이첼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막상 껍질을 까 보니 문제가 있었던 쪽은 리처드였다며 바로 화살을 돌린다. 이렇듯 매일매일이 싸움의 연속이고 서로를 증오하고 상대방을 상처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한다.

실제 난임부부의 관계 역시 영화에서처럼 건강하지 않다. 건강할 수가 없다. 차라리 영화에서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게 더 건강할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 난임이라는 문제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묻어두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말이다. 무엇이 됐든 난임이라는 것은 부부관계가 바닥까지 가게끔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처음에는 그 화살을 상대방에게 돌리다가 종국에는 자기 자신에게로 다시 돌린다는 것이다. 나의 그녀 역시 시험관 시술을 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상대방이 아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임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음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단순히 임신이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심리적인 문제들, 해결되지 않았던 내면의 문제들,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안의 상처 입은 목소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난임은 단지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고 실상은 그 뒤로 숨어 있는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나의 문제들이 진짜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레이첼과 리처드가 그들에게 상처만을 안겨 준 첫 번째 미혼모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와 거의 흡사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이제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서 두 번째 입양 신청자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서로에게 독한 말을 내뱉고 싸웠던 지난날의 어두운 터널을 이미 통과한 평안한 모습이다. 난임은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부부가 헤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실제로 부부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고, 그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않고 참으면서 상대방을 연민하면 훨씬 더 굳건하고 단단한 부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형성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진정성은 아기보다도 더 중요한 순금 같은 보석이다. 이 보석을 레이첼과 리처드는 드디어 가지게 되었다. 영화는 레이첼과 리처드가 입양을 신청한 상대방을 기다리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나지만 이제 그들은 아기가 없어도, 입양이 또다시 불발되어도, 깨지지 않는 사이가 되었음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경험 상, 이런 바닥을 경험하고 난 뒤에야 마침내 우리는 임신할 마음의 준비가, 부모가 될 준비가 된 것임을 알고 있다.

 


"조용하고 강한 진동"이라는 표현은 그녀의 시집 말미에 수록된 그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따 온 표현이다. 그녀는 자아가 완고해지지 않도록 조용하고 강한 진동으로 자기 자신을 흔들고 싶다고 썼다. 내가 볼 때 그녀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이것은 스스로는 깨닫기 어려운 것이지만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녀는 시를 써서 힘든 것인지, 힘들어서 시를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아마 둘 다 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녀에게 주어진 '시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동시에 그녀에게 주어진 난임의 숙제도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함으로써 그 터널을 통과했다. 하여, 10대의 경계심 많고 완고한 작은 세계를 구축했던 소녀는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어 자기의 세계를 부단히 넓히고 경계를 흔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시에서 느껴지는 희미하고 뿌연, 그렇지만 본질 자체는 한없이 밝은 그 빛을 잃지 않음으로써, 터널을 통과함으로써 그녀는 이제 돌을 앞둔 사랑스런 아기와 함께 오늘도 열심히 시를 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 글로써 그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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