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수 Dec 15. 2020

살아남아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

엘리자베스 보글레르, <우리는, 파리>

그녀와 나는 대학원에서 같은 전공 지도교수님 밑에 있었다. 어느 날, 우리 둘이 강의실 앞 복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시고는 교수님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으셨다.


     "너네 둘이 친하니?"

 

그녀가 대답했다.


    "네, 심적으로요."
     "안 친하다는 얘기구나?"

     "..."


그녀에게 '친하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범주는 매우 넓었고, 교수님의 그것은 실용주의자답게 매우 좁았다. 나는 그 중간에서 교수님의 의중도 알았고, 그녀가 의미하는 바도 알았다. 우리는 친하기도 했고, 안 친하기도 했다. 심적으로 친하다는 것. 그건 매일 만나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쇼핑을 하고 카톡을 하고 콘서트를 가는 등의 물리적이고 기능적이고 실체적인 친밀함이 아니라, 내적으로 통하는 비실체적인 내밀함이 있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따로 연락을 하거나 밥을 먹은 적은 얼마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상호 끌림이 있었고, 얼굴을 보면 미소가 흘렀고, 서로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적으로 응원해주고 지켜봐 주는 사이였다.

눈이 크고 맑은 그녀, 프랑스어를 잘하는 그녀, 아름다움을 향한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감각을 가진 그녀.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 공연예술학 전공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오랜 기간 살았고, 그녀보다도 프랑스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삶은 미적인 것을 이미 체득하고 태어난 프랑스 사람들의 인식을 내재화한 것 같았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글과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과 그녀가 연주하는 기타 소리와 부드럽고 지적인 목소리와 아름다움의 끝은 늘 슬픔이라고 하는 노랫말들. 그녀의 손 끝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모두 시적이었다. 심지어 논문까지도.

나는 나름 그녀를 오래 알았다. 프랑스 유학기간 동안 그녀는 변했다. 내가 나이를 먹으며 변한 것처럼. 그녀의 노랫말은 더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차별받는 자들, 피해를 입었으나 반박할 언어를 갖지 못한 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말과 글에 좀 더 슬픔이, 분노가 묻어져 나왔다. 예전에는 몽상가로서의 프랑스인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주의적인 프랑스인이 되었다. 그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파리에서는, 그녀가 사랑하는 극장에서는, 그녀가 사는 동네의 옆 동네에서는 테러가 빈번해졌다.

 



2015년에 프랑스에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만큼 비참하고 잔인한 테러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1월에는 <샤를리 에브도> 잡지 사무실에 무장 테러리스트들이 침입해서 총기난사로 10명의 직원과 2명의 경찰이 숨졌다. 11월 13일에는 IS에 의한 자살 폭탄 및 총기 난사 테러가 프랑스 시내에서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쳤다. 프랑스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받아보던 나 역시도 마치 바로 옆에서 벌어진 일인 것 마냥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녀는 무사한지, 프랑스에 사는 다른 지인들은 무사한지. 다행히 그들은 무사했다. 심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파리>라는 넷플릭스 영화는 바로 이 사건들에 대한 영화이다. 겉으로 봤을 땐 파리를 무대로 한 젊은 남녀의 로맨스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남녀 간의 연애나 사랑이 결코 아니다. (※ 주의: 아래 내용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인 사이인 그레그Greg와 아나Anna는 사소한 일들로 자주 다투는데 그레그는 돈을 더 잘 벌기 위해 파리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거처를 옮기려고 하고, 아나는 그가 자신의 일을 위해 독단적으로 바르셀로나로 가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고려해서 한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레그는 바르셀로나로 가게 되고, 아나는 파리에 남게 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타려고 한다(어떤 연유에선지 탑승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여기에 탄 148명의 승무원 및 승객은 전원 사망한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2015년에 벌어진 테러를 의미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거리에 나온 시민들이 외친 구호들, "난 여기 있습니다.(Je suis Là)"라든가 "내가 샤를리입니다.(Je suis Charlie)"라는 구호를 영화에 그대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아나는 자신이 탔을 수도 있는, 그래서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살아남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그녀의 삶은 변하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현실은 마치 비디오 게임과 같아서 모든 것이 명확하게 결정되어 있고, 비디오 게임의 외부에는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창조한 다른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녀는 현실의 삶에 그다지 열정이 없었다. 현실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레그와 자주 다툰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레그는 열심히 돈을 벌고, 파리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테러 이후의 아나는 현실과 바깥(현실의 외부)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그렇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명확하고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어 예측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 매우 불명확하게, 흐릿하게, 예측 불가능한 현실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확실했던 세계는, 확실했던 자기 자신은 이제 공허해지고 그럼으로써 슬픈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아나는 오히려 염세적인 모습에서 낙관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레그처럼 바르셀로나라는 다른 세계로 이동함으로써가 아니라 파리라는 그녀가 살던 바로 그곳에 (살아) 남아 있음으로써. 따라서 <우리는, 파리>라고 (아쉽게) 번역된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 <Paris est à nous>인 것은, 테러 이후의 파리는 여전히 테러리스트들이 아닌 우리의 것이며, 우리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게다가 여기서의 '우리'는 극 중 인물인 그레그와 아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 각각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서 말이다.

영화에서 테러 이후 광장에서는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격렬한 시위대를 잠재우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과 구급차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아나는 어느 날의 광장에서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것을 듣게 된다. 감독이 자신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광장의 연설은 '우리'를 묶어주는 에너지이자 원동력으로서의 인류애를 강조한다. 테러리스트들이 우리의 가족들의 목숨을 빼앗고, 우리의 일상을 빼앗을지언정 프랑스의 자유(Liberté)와 인류를 향한 애정, 고귀한 정신은 파괴되지 못할 것임을 역설한다. 광장에 모인 아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이 연설에 굉장히 탄복하고 감동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이다. 광장에서의 연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인류애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굳건한 프랑스를 위한 국수주의적인 인용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의 정체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라고 명확하게 지칭하고 있지는 않지만 샤를리 에브도 테러나 11월 13일 밤의 테러의 배후에 이슬람 극단주의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직접 발표한 바가 있으므로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 테러가 단순히 작은 잡지사에서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하메드를 조롱한 것에 대한 과격파들의 보복이라는 나태한 프레임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까.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프랑스 대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일차원적인 대립이 성사됨으로써 프랑스로서는 국가적인 단합을 도모하고 이슬람 과격파들에게는 유럽 내부의 반무슬림 정서를 강화해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양자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가 놓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참고: <테러범을 키운 것은 프랑스 자신이다>, 한겨레, 2015. 1. 20. 이택광/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74532.html) 아나가 진실로 자신의 바깥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 바깥은 프랑스, 파리로 수렴될 것이 아니라 지금의 프랑스를 있게 한,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바깥(dehors)'이라는 개념은 영화에서도 쓰이지만 참으로 프랑스적인 철학 개념이다. 이 개념을 이론화했던 철학자인 모리스 블랑쇼는 바깥을 빈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계의 중심이었고 유럽의 중심이었던, 역사적, 문화적, 지형학적으로 늘 중심에 있어왔던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굳이)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바깥이라는 개념 자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한 자기 완결적인 개인주의와 모더니즘에 균열을 일으키는 개념이다. 이것은 결국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현실과 초현실 등등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내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외부이고,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은 (자아 바깥의) 타자의 존재라는 상호 의존성을 의미하기에 영화에서도 그레그가 파리에서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라는 타자로 떠나는 것보다, 파리와 바르셀로나는 서로 단절되어 있는 각각의 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파리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임을 아나를 통해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는 말한다.


"바깥은 여기이자 제 속에 있으며 어디에도 있죠. 더는 바깥세상을 제 속에서 빼낼 수 없어요. 제가 그 전부니까요. 바깥을 파괴하려면 제 자신을 파괴해야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단히 프랑스적인 또 하나의 태도는 바로 서로 분열되고 단절되어 있는 개인을 '우리'로서 묶어주고 단결시켜 주는 요소들이 어떤 신념이나 가치 체계, 이념이 아니라 "노래, 만남의 순간, 주고받는 눈길, 사랑, 이야기, 조상, 기억,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아나가 말하는 부분에서이다. 이러한 미적이고 감성적인 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고, 우린 거기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어떤 신념 하에 사람들이 뭉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정치적인 보수의 이념들, 진보의 이념들, 혹은 사상적인 사회주의의 이념들, 신자유주의의 이념들. 더 간단하게는 가부장적인 체계들, 친족 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의 이념들 같은. 하지만 아나가 나열한 미적인 것들은 사람들을 감성으로 묶어주기 때문에 그것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배제한다든가, 권력화한다든가 하는 일체의 행위들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아나의 독백을 통해 영화가 프랑스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 세상이 비행기 추락 같다고 하더라도. 아주 긴 추락이래도. 우린 새로운 걸 시도해야 해. 함께 이 추락의 경로를 바꿔야 해."라는 낙관적인 태도이다.

2015년 파리 테러 이후에 나타난 프랑스인들의 해시태그 역시 "우린 테라스에 있다(Je suis en terrasse)"였다. 이 구호는 얼마나 프랑스적이며, 낭만적이며, 시적이며, 비극을 맞이했다고는 볼 수 없는 프랑스인들의 세련됨인가.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먼 타국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얼마나 부러움의, 갈망의 대상으로서 여기게 하는가. 테러리스트들이 그들의 자유로운 일상을 파괴시키려 들지라도 절대 그 의도에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평소처럼 테라스에 나가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일상을 보낼 것이라는 것. 평소에도 프랑스의 문화와 철학을 동경해 온 나는 테러라는 비상사태에도 의연하게 대응하는 그들의 모습이 부러워서 sns에 관련 기사를 올리기도 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이 굉장히 유아적이고 일차원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나의 그녀가 그 링크에 댓글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그리고 테라스에 나가는 것 자체가 근본이 아님을.

그러했다. 그 댓글을 읽고 나는 어찌나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꼈는지. 정작 파리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두려움이며 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포였을텐데 나는 얼마나 가볍게 그 태도를 동경하고 받아들였는지. 밤마다 멀리서 울리는 총성 소리에 잠 못 이루고, 내일 당장에 먹을 식료품을 사러 집 밖을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 어디서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테러 이전의 일상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심리적으로 무너져 버린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우린 테라스에 있다'라든가 '난 여기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얼마나 공허한 것일 수 있는지를 지구 반대편에서 아주 적은 인구의 무슬림들이 살고, 이슬람을 믿는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은 차마 알지 못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 아마도 많은 생각을 해왔을 그녀는 sns에 무사한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이번 테러에 대해, 아니 테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우린 테라스에 있다'라는 태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담긴 장문의 글을 남겼다. 요지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맞서 지킬 것이 한낱 내 개인의 자유와 기쁨이라면 굳이 테라스에 나갈 용기를 내지 않으리라는 것. 프랑스라는 나라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신자유주의의 수용으로 인해 발생한 뿌리 깊은 계급갈등이 그 이면에 있음에도 자신들의 눈길을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공동체로 돌리지 않고 굳건한 프랑스를 외치며 테라스에 나가는 자유 정도를 수호하는 것으로만 자위하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 소외된 자들, 차별받은 자들, 언어를 빼앗긴 자들,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 자본주의의 소비의 쾌락으로부터 훼손되어 가는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로, 다시 말해 '타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테러에 직면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라는 그녀의 무거운 메시지가 sns라는 가벼운 매체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다.  




영화에서 아나가 공동묘지에서 달리고 있자 묘지에서는 달리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말을 거는 백발의 노인이 등장한다. 그는 몇 년 전에 운명을 달리 한 자신의 딸을 만나러 묘지에 온 것인데, 아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에게 주려고 가져온 꽃 화분을 아나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가씨한테는 무언가가 있어요. 무언가... 적당한 말을 못 찾겠네요. 하지만 보여요. 아가씨 속에는 아주 특별한 게 있어요. 뭐랄까, 아가씨는 모든 것의 바깥에 있어요."


프랑스 테러에 대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쉬운 태도와는 별개로, 나는 이 문장을 빌려 나의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다. 물론 그녀는 바깥이라는 말이 일차원적으로 내포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아웃사이더'는 결코 아니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너무나도 많고, 그녀 역시도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다정함의 매력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예술적, 학문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임에도 그녀의 글은 들떠있지 않고 차분하게, 아름답다. 으스댐이 없고 거들먹거림이 없으며 계도적이지 않고 사족이 없다. 오히려 슬프고 외로우며 따뜻하면서도 쓸쓸한데, 읽는 사람의 힘을 다 빼놓는 슬픔이 아니라 공허한 마음을 차오르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슬픔을 지녔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의 뿌리에 놓여 있는 죽음에 대한 사유는 아마도 2015년의 비극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능한 미적인 변화이지 않았을까 싶다. 수많은 희생자들 중에 내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 그렇지만, 어찌 됐든 살아남았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을 발판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더 단단해졌고 그녀의 말과 글은 더 슬퍼졌고 그녀의 노래는 더 아름다워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 : 내가 사랑한 여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