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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Feb 22. 2021

타인의 상처를 느끼는 사람

케론, <나쁜 아이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재학 시절에 학교 건물 같은 층 복도에서였다. 그녀는 한껏 줄여 입은 교복에 당시 유행하던 바가지 머리를 했고 무표정의 얼굴에 눈빛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내 신체 사이즈를 가리는 펑퍼짐한 교복에 성별을 알 수 없는 머리 스타일에 범생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갈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 깔았다.

내가 우리 동네에서 꽤 먼 지역의 고등학교로 배정받았을 때 우리 중학교에서 이 고등학교로 배정받은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단 세 명뿐이었다. 그중에 그녀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가족만큼 친밀한 우정을 나누며 지내오고 있다. 재밌는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중학교 때처럼 거칠고 사납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눈빛은 매우 온순(?)했고, 얼굴 표정은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180도 변화된 모습을 늘 놀라워했다. 고등학교에서 친해진 친구들은 중학교 시절의 그녀의 모습을 몰랐으므로 내가 그런 얘기를 해줄 때마다 믿을 수 없어하면서 그 사나운 눈빛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난 그녀의 예전 모습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 특권이라도 되는 양 그 친구들 옆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사실보다 더 과장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중에 친해진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학교 때 그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이기는 했는데, 가정 안에 일어나는 여러 일로 조금 더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마음들이 조금씩 치유가 되었고,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마음과 상처를 품고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심리를 전공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 공부와 실습을 마치고, 현재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내면의 깊은 상처들을 아직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취약성을 다루는 전문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 <불완전함의 선물> 등의 저서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 전문가 브레네 브라운은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라는 또 다른 그녀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신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하이 론섬*은 아름답고 강렬한 곳이 될 수 있다. 또한 상처를 '퍼트리는' 대신 상처를 '느끼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바뀔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도록 도와줄 대책을 세우고 나눌 수 있는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세상에서라면 힘겹게 버둥거리고 있을 때 멀리서 소리만 지르고 서로 돕기를 거부하는 대신 용기를 내 서로를 위해 나설 수 있을 것이다.**
*하이 론섬(hign lonesome) : 블루그래스 장르의 사운드나 음악 유형을 일컫는 말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 행진하면서 외친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함 소리를 모티프로 했다고 한다.(필자 주)
** 브레네 브라운,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북라이프, 2018, p. 86


나는 이 단락을 읽으며 상처를 느낀다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나쁜 아이들>이라는 넷플릭스 영화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케론 감독의 <나쁜 아이들(Mauvaises Herbes)>은 영화의 상세 정보에서 장르가 코미디라고 나온다. 그러나 첫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가 어떻게 코미디가 될 수 있나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주의: 아래 내용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와엘은 중동의 어느 지역에서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 살다가 그가 아직 어릴 때에 서방 세계로 추정되는 국가의 군인들에 의해 그가 살던 동네 전체가 참혹하게 학살되는 일을 겪게 된다. 그의 동네 주민들이, 이웃들이, 가족들이 모두 총살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어린 그가 생존해 온 방식은 구걸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빠르고 꾀가 남달랐던 와엘은 구걸만 해서는 살기 힘든 현실을 깨닫고, 길에서 우연히 주운 선글라스를 끼고 눈이 보이지 않는 척 연기를 하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가 된다. 그런 그를 발견하고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보육원으로 데려 온 수녀 모니크를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엄청난 행운과 축복이었다.

시간이 지나 프랑스 파리에서 살게 된 모니크와 와엘은 사기꾼 노릇을 하며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다가 우연히 청소년 사회복지재단의 대표로 일하는 빅토르를 만나게 되고, 빅토르는 고등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학교에서 퇴학 위기에 놓인 학생들을 재교육한 뒤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는 일을 맡을 사회복지사가 구해지지 않아서 난감해하던 차에 모니크의 강력한 권고로 사회복지사가 구해질 때까지 임시로 와엘을 대타로 쓰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굉장히 뻔한 방식으로, 와엘이 그 문제 아이들을 틀에 박힌 교육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고 대하면서, 학생들이 와엘에게 마음을 열고 문제 행동들이 고쳐지는 스토리를 들려준다.  

영화는 시종일관 와엘이 어린 시절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토대로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남모를 고통과 상처를 와엘이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제안하는데, 가족도 모르는 그들의 상처를 와엘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과거에 비슷한 일들을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이다. 전쟁고아였던 와엘이 어린 나이에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선천적인 꾀와 눈치 덕분이었는데, 그렇게 산전수전을 겪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상처들이 더 잘, 더 쉽게 보였던 것이다.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은 와엘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외부에 있는 타인들의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파리의 시내에 나가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분석한 뒤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통해 돈을 얻어내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 온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을 시킨 것이었다. 물론 이것 역시 와엘이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한 경험과 그것을 토대로 사기꾼으로 성공한(?) 경력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돈을 구걸하기 위해, 즉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타인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외부 세계로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스스로 벽을 만들고 교류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고립을 자초하고 자기만의 옹졸한 세계에 갇혀 자기만 옳다는 오만함 혹은 자기만 실패했다는 무력감을 만든다. 와엘을 만나기 전의 그 아이들처럼.

영화의 프랑스어 원 제목인 Mauvaises Herbes는 잡초라는 뜻이다. 아마도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을 가리키는 메타포일 것이다. 혹은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아온 와엘 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느끼기엔 후자가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잡초'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보다가 '인간이 경작하는 농작물에 해로운 식물'이라는 정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인간의 계획 하에 씨를 뿌려서 뿌리내린 쓸모 있는 식물을 제외한, 누가 경작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에서 스스로 나고 자란 모든 식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단단하고, 생명력이 강하고, 빠르고 넓게 퍼져서 삽시간에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하게 되는. 그러면서 나는 이 영화가 와엘이 문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다시 학교에 적응하는 학생들로 변화시킨다는 뻔한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와엘이 말할 수 없는 모진 시간들을 겪어왔음에도 어떻게 그 사건들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지 않고 내면에서 극복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생겼다. 물론 완전하게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마치 그 상처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상처에 잠식되지 않고, 그 상처가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었어도 누구의 탓으로 계속해서 상처의 주체를 전가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지점까지 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상처를 타인을 돕는 계기로 사용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보통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단계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리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10대 시절에 이미 자신의 진로와 비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 나의 그녀의 결심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나는 기껏해야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면서도 돈 벌고 살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꼬매고 싸매서 그것을 딛고 타인에게 나아가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와엘은 타인에 대해서는 굉장히 눈치가 빠르고 관찰력이 대단하지만,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조금 무관심했던 것 같다. 영화 내내 모니크는 와엘에게 여자를 만나라고, 와엘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여자들의 연락처에 연락해서 밥이라도 한번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와엘은 관심이 생긴 여자들에게 접근해 연락처만 따내고 굳이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진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브레네 브라운은 앞의 책에서 "겁이 날 때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 같아요. 내 삶을 사는 대신 관조하면서 관찰하고 연구해요."(Ibid., p. 33)라고 말했다. 자신을 깨뜨리고 자신의 상처 안에 잠식되지 않기 위하여 외부의 세계로 끊임없이 나가야 함을 잘 알기에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조언했던 와엘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 맺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겁먹은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사라라는 여인이 마음에 들어 연락처를 따놓고는 잊고 있다가 사라가 와엘이 가르치는 학생 중 한 명인 나디아의 친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 와엘은 모니크와 나디아의 도움으로 사라와 식사를 하게 되는데, 직업이 무엇이냐는 사라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 사기를 치고 산다는 솔직한 대답을 한다. 나는 감독이 왜 굳이 이 장면을 넣었을까 생각하다가 와엘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은연중에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스스로의 문제를 극복해내는 용기가 생겼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좋아하게 된 상대방 앞에서 수치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본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 이런 용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을 보호해 줄 최소한의 장치도 없던 와엘은, 그 마음에 난 심연 같은 구멍에 끊임없이 사랑을 부어 주었던 모니크가 있었기 때문에 생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래서 영화는 와엘이 학생들의 상처를 하나씩 꿰매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와엘과 모니크의 관계를 조명하고 평행시킨다. 와엘이 사기꾼으로 살지만 본성 자체가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진하게 묻어 나오는데, 비뚤어질 이유가 그렇지 않을 이유보다 많았던 그의 삶에서 그가 세상에 대한 냉소와 분노에 빠지지 않고 타인을 향한 관대함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를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그녀가 상담이 끝나고 난 뒤에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세상에 자신을 받쳐줄 수 있는 뿌리나 버팀목이 없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면 그것을 헤쳐나갈 아주 미미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이야기. 영화에서도 와엘이 보육원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 조제프가 계속되는 성추행에 스스로 생을 마친 이야기가 나온다. 와엘은 그 경험을 떠올리며 가정 내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있었던 학생 샤나에게 그 일을 마음에 묻어두지 말고 꼭 믿을 만하고 그녀를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에게 꼭 이야기를 터놓으라고 말한다.

하여, 브레네 브라운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해받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자신에게 해로운 행위를 계속하기란 고단한 일이다."(Ibid., pp. 29-30)




그녀는 타인의 상처를 느끼는 사람이다. 직업이 그런 직업이기도 하지만, 직업과 무관하게 원래 타고난 능력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털털하고 유머러스한 친구이지만, 사실 그녀는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보통 사람들은 잘 못 느끼는 아주 약간의 불편함도 감지해 내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에서도 발화자의 숨겨진 감정 같은 것들을 잘 캐치해 내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격 자체도 예민한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매우 솔직하고 스스로를 오픈할 줄 아는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은 그녀와 대화할 때 편안함을 느끼고 남들에게는 잘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능력은 공부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타고난 것인데 이 타고난 능력과 그녀의 비전과 직업이 잘 어우러져서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숨겨진 내면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힘듦이, 그 무언의 상처들이 그녀에게로 여과 없이 전해지는 날에는 그녀도 사람인지라, 그리고 그것들을 더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라 정신이 고단 해지는 것을 넘어서 신체도 눈에 띄게 고단 해지는 것을 보았다. 심각한 번아웃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녀 스스로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마음이 쉴 수 있는 건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그녀의 곁에는 나를 포함하여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힘들이 모여서 그녀를 지탱해주고 있다. 타인의 상처를 느끼고 그들이 스스로의 취약성을 딛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그녀는 그들에게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그런 그녀가 나의 친구라는 게 내게는 너무나도 큰 행운이자 축복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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