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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Feb 02. 2021

삶을 선물하는 사람

프란체스코 아마토, <열여덟 번의 선물>

그녀는 나의 대학 동기다. 우리가 같이 대학을 다니던 오래 전의 어느 날, 기억하기로는 시험 기간이어서 밤늦게까지 중앙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10시 반쯤에 같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었더랬다. 난 그녀와 단둘이 있으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언니, 언니는 왜 엄마 얘기는 안 해?"


내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그녀는 웃었고, 나도 웃었다.


    "아파서, 병원에 있어."

    "아, 많이 안 좋으신 거야?"

    "... 5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정신이 완전하게 오지는 않았지만... 간병인이 돌봐주고 있고..."


20대 초반의 나는 천진난만함을 가장한 무례함을 지니고 살았었나 보다. 그녀와 나, 그리고 다른 두 명까지 해서 우리는 학교에서 매일 만나서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커피를 마시고, 시간이 맞으면 같은 강의도 듣고, 강의가 끝나면 놀러 나가고, 여행을 가고 등등, 매일 붙어 다니던 사이였다.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으니 나누는 이야기들도 많았을 거고, 연애 얘기는 물론이고 가족 얘기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공유하는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그녀가 유독 지나가는 식으로라도 자신의 엄마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도 그 시기의 나는 그 정도로 사려 깊지는 못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한 것을 못 참고 무례하게 물어봤었다.

내가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만큼 친밀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녀의 성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글을 그녀가 본다면 "내가??"라고 놀라면서 반문할 수도 있는데, 내가 경험하기론 그랬다. 내가 그런 질문을 해도 그녀가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한껏 뛰어넘기는 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강의 시간에 항상 지각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붙인 '◯◯ 타임'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강의 시간 전에 도착하는 법이 없고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기 직전에 강의실에 들어와서 우리 옆에 앉았다. 그녀는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얬고, 마른 편이어서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는데 그녀 자신은 그녀의 손이 (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말라서) 닭발 같다고 말하곤 했다. 목소리도 얇고 머리카락도 얇고 웃을 때도 정말 웃길 때 빼고는 힘없는 미소에 한숨을 자주 쉬었지만 -우리가 그녀를 놀리는 포인트였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저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맡은 일을 (불평은 한가득이었지만) 끝까지 해낼 줄 알고, 아니 오히려 그 이상 성취했으며, 조용해 보였지만 사부작사부작 이것저것 다 잘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내면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겉모습으로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그녀만큼 보이는 것과 실제가 정반대인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우리 중에서 그녀가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아기를 가졌고, 가장 먼저 엄마가 되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그녀의 엄마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프란체스코 아마토 감독의 <열여덟 번의 선물>이라는 이탈리아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주의 : 아래 내용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임신 8개월 차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유방암 판정을 받게 되고, 아기를 출산하고 나서 사망한다. 엘리사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난 이후에 뱃속의 딸 안나를 위해 18개의 선물을 준비하고, 딸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 매년 생일마다 선물을 1개씩 챙겨주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열여덟 번의 선물>이다.

영화의 줄거리 중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은 이게 전부이다. 줄거리만 들었을 때 이 영화는 굉장히 신파스러운데, 실제로도 신파여서 보는 내내 눈물 콧물을 다 쏟아 냈다. 나는 이런 류의 신파는 안 좋아하는데,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제 이런 영화를 보면 특히 부모의 마음에 더 몰입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매년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엄마의 선물을 사람들 앞에서 행복한 척 기쁜 척 풀어 보는 데에 진력이 난 안나가 18번째 생일날 엄마가 남긴 선물을 뜯어보지 않고 아빠와 싸운 뒤 도망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데서부터 픽션이 시작된다. 안나는 이 사고로 18년 전으로 타임 슬립을 하게 되는데, 안나를 친 자동차의 운전자가 바로 엄마 엘리사였던 것으로 설정된다. 그래서 유방암 판정을 받은 바로 그 날의 엘리사와 안나가 교통사고를 계기로 만나게 된다.

사고가 난 안나를 엘리사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안나는 엘리사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엘리사 옆에 붙어 있으려고 이런저런 거짓말을 하게 되고, 둘은 점점 더 친밀한 사이가 되어 엘리사가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 이를테면 수영이라든가 아기방 꾸미기 등과 더불어 나중에는 딸을 위해 18개의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안나가 도와주게 된다. 뱃속의 안나를 위해 성인이 된 안나가 선물을 골라주는 것이다. 그리고 18번째 선물을 준비하는 날, 엘리사는 안나가 미래에서 온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은 엘리사가 자신이 해야 될 일들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일들의 대부분은 남편인 알레시오보다는 딸 안나와 함께 이루어간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하고, 스킨쉽을 하기도 한다. 사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현의 수단들은 따로 떼놓고 보면 사랑 자체와는 무관하다. 아마도 엘리사 역시 자신이 안나의 옆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생일선물로 대체해서 준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나는 그 사랑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은 채로 선물이라는 물건 자체만을 접했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여, 출산과 사망을 목전에 둔 마지막 순간에 엘리사는 물건보다는 안나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함께 만들었던 자신의 프리텔레 디 멜레(사과 튀김) 레시피를 마지막 18번째 선물로 남긴다.  

사실 엘리사가 준비했던 18번째 선물은 성인이 된 안나가 생일파티에 입어줬으면 하는 푸른색 드레스였다. 그런데 그 선물을 같이 고르면서 안나가 18년 뒤에는 이 드레스가 촌스러워질 것이라 말한 것이 생각 나 엘리사는 드레스를 환불하려고 했다. 드레스를 고르다가 엘리사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이 드레스의 행방은 묘연했으나, 안나가 18년 뒤의 현재로 다시 타임슬립을 하고 자신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 알레시오는 엘리사가 환불해달라고 했지만 자신이 그냥 가지고 있었던 이 푸른색 드레스를 안나에게 선물한다. 엘리사가 환불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안나는 모르고 있었기에, 이 선물은 엄마가 아닌, 아빠가 준비한 선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선물을 통해 안나는 알레시오와 화해와 이해의 포옹을 하며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푼다.

삶은 선물이다. 선물은 내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지는 소득이나 성취물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현재로 돌아온 안나는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했던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엘리사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그 선물이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엘리사의 사랑임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체가 엘리사가 남긴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엘리사의 죽음 때문에 더더욱 두드러졌지만 사실 출산의 과정 자체가 엄마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마가 살아있을지라도 그 사랑의 위대함은 결코 퇴색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하여, 삶과 사랑은 대를 이어 내려온다. 우리는 모두 부모에게서 났으며, 우리의 부모는 조부모에게서 났고, 조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났으며…. 그래서 우리 모두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미래를 연결한다. 안나는 출산 전에 치러지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들의 자녀인 자신의 부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본다. 그들의 사랑으로 엘리사가 태어났고, 엘리사와 알레시오의 사랑으로 안나가 태어났음을.




가장 눈부시게 밝은 날에도 너는 내 별을 볼 수 있어.


과거에 발생해서 미래의 우리가 그 빛을 보는 별처럼, 밤하늘에만 빛나는 별이 아니라 밤낮없이 항상 빛나고 있는 별처럼, 엄마라는 존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도 자녀에게 선물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여, 엘리사는 안나에게 위와 같이 말했다.

나의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직장에서도 (불평은 할지언정) 열심히 일하면서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잘 해내 왔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순서대로 낳았다.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우리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마도 언젠가는 닥칠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상실의 슬픔을 누가 헤어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나아갔다. 불확실한 치료를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그 시간에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선물을 사기로 결심한 엘리사처럼. 지금 그녀는 두 딸과 아들과 함께 복작복작한 가정을 이루어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내가 알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채, 오늘도 자녀들에게 삶을 선물하며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이 글을 선물로 남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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