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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소묘 Jan 13. 2024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동시대를 사는 모습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다.



 수일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일상이 아름다웠을 그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폭탄으로 부서지고 무너져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되었다. 그 공간 속에 사람들이 있다. 피투성이인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처참한 모습들, 죽은 아이를 감싸 안고 괴로움에 울부짖는 사람들, 머리에 다리에 온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주저앉은 사람들, 파괴된 건물 주변에는 고사리손에 총을 야무지게 든 채 서 있는 아이도 보인다.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그럼에도 새해는 밝았다. 새해에도 전해진 소식은 여전히 밝지만은 않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소식이 들린다.


 해묵은 전쟁이 끝이 보이지 않은 상태임에도 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 소식은 소름 돋는 현실이다. 지금 이 시각 살아 있는 사람들은 비극적 사태를 간신히 모면한 생존자들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지진 재해 장면, 곳곳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을 보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태어나는 모두에게 죽음은 예정되어 있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죽음을 피하려고 산해진미를 찾고 명약을 찾아 헤맸지만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지 않은가.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난다는 어느 작가의 말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죽음과 현재 우리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이유 있는 혹은 자연적인 죽음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의 죽음은 언제 어느 시기에 나에게 덮쳐 올지 모르는 재앙과도 같다. 매일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사고와 재해와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무치기 시작했다.


 때때로 산다는 것에 회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의 소식들은 반어법처럼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알게 해 주었다. 어쩌면 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살아남고 있었다는 것도. 근원 모를 전염병으로부터, 느닷없는 재해로부터, 예고 없는 불운으로부터, 돌발적인 사고로부터 살아남고 있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던 것이다. 젊었을 때 젊음을 의식하기 어렵듯이, 아름다웠던 순간에 아름다움을 의식하기는 어렵다. 올 한 해도 경황없이 출근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잔병치레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면서 늙어갈 것이다.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과 맞서야 하는 생명체가 인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니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 것인가. 세계는 권력자 것일지 몰라도, 삶만큼은 상상하며 읽고, 상상하며 쓰고, 상상하며 말하는 개인들의 것이다. 올 한 해도 가볍지 않은 삶을 가만히 바라 볼 그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불행하게도 삶이란 살아남은 기적 속에서 또다시 삶의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The Pianist’라는 영화가 있다.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유대인 학살에(홀로코스트) 휩쓸리고 만다. 아름다운 음악 예술을 삶의 목표로 살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전쟁 속에 홀로 서게 된다. 피아니스트로서 삶을 포기하고,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 삶도 포기하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못 본채 외면한다. 그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그.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을 살린 것은 자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예술적 재능과 독일군의 한 방울 휴머니즘이었다.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에게 독일군은 묻는다.


‘먹을 건 있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을 무자비한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독일군을 만나 그는 살아남는다.

 편을 가르는 것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상대편과 내 편을 나누니 서로 적대적인 마음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뻔한 일에서는 먼저 휴머니즘을 먼저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올 한 해도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힘들죠, 춥죠, 배고프죠.’ 이런 말을 건네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방울의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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