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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소묘 Mar 29. 2023

그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무제는 왜 무제인가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는 작가의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알록달록 웅성웅성. 기다랗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술관은 관람객들로 가득하다. 입장하기 위해 늘어선 대기 줄이 제법 길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는 작가의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거대한 벽면에 알록달록 밝게 웃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줄지어 그려져 있다. 꽃들은 커다란 카펫이 되기도 하고 거대한 공이 되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디선가 많이 본 무지갯빛 꽃이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 어디쯤으로 생각했던 그 꽃의 오리지널 창작자가 오늘 전시의 주인공이다.

무라카미 좀비전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4월 16일까지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의 개인전 ‘무라키미 좀비 전’이 열린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현재 일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좀비 미학’을 전개하고자 했다고 한다.
‘좀비 미학’이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생소한 용어다.   

   

 작품은 대부분 알루미늄판을 입힌 화판을 사용하여 배경에서 반사된 빛 덕분에 더욱 화려해 보인다. 화사하고 밝은 캔버스에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형형색색의 좀비들로 거대한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레진(Resin), 천, 강화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된 작품들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작품은 ‘좀비가 된 작가와 그의 강아지’다. 언듯 보기에도 괴기스럽고 엽기적이다. 처음에는 혐오감에 곁눈질로 보다가 섬세한 표현과 제작 솜씨에 감탄하며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얼핏 좀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같지만 작가의 설명을 읽어보니 철학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무라카미 좀비 전


그러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화풍이다. 기분을 좋게도 했다가 나쁘게도 했다가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정말 예술작품인가’ 싶기도 했다가 ‘예술작품이니 미술관에 전시하겠지’ 하고 적대감을 슬며시 내려놓게도 한다.     


 미술관 여기저기에서 연신 플래시가 터진다. 어디나 포토존이다. 관람객들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고 작품과 포즈를 취한다. 갤러리 같기도 하고 놀이동산 같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해석 불가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라카미 좀비 전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작품에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그렇듯 호평과 혹평을 넘나들 것이다. 팝 아트의 창시자인 ‘앤디 워홀(Andy Warhol)’도,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도 ‘키스 헤링(Keith Haring)’도 혹독한 비평과 미디어의 환호 속에서 고뇌했다. 심지어 현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반 고흐(Vincent van Gogh)도 살아생전 화단의 냉대 속에서 홀대받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고 우리는 감상한다. 감상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에게는 예술 작품을 대할 때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모호함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감상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에게는 예술 작품을 대할 때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모호함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평론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는 예술작품을 보는 사람의 숫자만큼의 해석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예술작품의 해석은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는 예술을 보는 표준적인 방식은 없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감상이 가능하고,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제안을 한다. 이러한 그의 제안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은 존재 가능할까? 사실 그런 것은 없다.

 그렇다. 그림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림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보자. 그리고 나만의 해석을 붙여보자. 그렇게 예술은 우리 곁에 자리 잡는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예술작품의 해석은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_존 버거”


 작가의 제작 의도는 있겠지만 감상자가 그 의도대로 감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자. 느낌이 없다면 없는 대로 그만이다. 지금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삶의 한순간에 떠오르는 작품이 있을 것이다. 작품은 감상자가 있음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감상자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학습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감상자의 해석은 작가의 의도보다 창조적일 수 있다. 창조적 해석을 함으로써 예술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예술 작품에는 유독 '무제'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들이 많다. 제목을 왜 정하지 않았을까? 이는 해석을 감상자에게 맡기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작가는 감상자의 해석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마음을 꿰뚫거나 작가보다 더 나은 해석자를 찾기 위한 장치 일 수 있다. ‘현대 예술은 너무 어려워’ 하며 외면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을 더해 감상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애호가가 될 것이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의 마음을 담아 말을 걸어보자. 반복해서 말을 걸어 대화가 거듭 된다면 결국은 감탄하며 미술관을 걸어나 올 것이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의 마음을 담아 말을 걸어보자. 반복해서 말을 걸어 대화가 거듭 된다면 결국은 감탄하며 미술관을 걸어나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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