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2차 가해자는 알까?
: 자신의 세치 혀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내가 성폭력 피해자임을 보스이자 신뢰하던 교수에게 이야기하고 적절한 조치를 기대했으나,
오히려 내게 "조직의 원활한 운영과 발전"을 위해 "(가해자)에게 일할 공간을 내어주고" 조직에서 나가라는 말을 들은 지 벌써 5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 뒤로 나를 다시 조직에 넣어 달라고 호소하고 간청하고 또 분노를 표하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묵묵부답이며 겨우 한마디 들은 것은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다"라는 말이다. 본인의 2차 가해에 피해를 입었는데... 그럼 도대체 누구와 유관한 일이라는 건지..
함께 지내던 동료 박사도 처음에는 나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는 듯하였으나 결국은 교수와 함께 내 연락을 받지 않고 있다.
그동안 신경정신과 병원도 꾸준히 다니고... 약도 뭐 가끔씩 빼먹을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먹으며 지냈다.
하지만 얼마 전 아는 교수님을 만나 내가 5개월 동안 겪은 일을 말씀드리니 다시금 트라우마가 건드려졌나 보다. 뜨거운 눈물이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멈추지를 않는다. 하루에 손수건 몇 장을 쓰는 것인지...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 교수님도 내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셨지만... 나를 내쫓은 교수의 의사에 반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실 것 같다. 한 사람으로서의 선의나 학자로서의 양심보다는, 사회생활, 그 망할 놈의 사회생활을 하셔야 하니까.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씩씩한 일상을 담아보겠다는 이 브런치의 취지와는 달리, 나의 브런치가 자꾸만 우울해지고 있구나... 독자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처음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근데 그때는 내가 2차 가해까지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리고 2차 가해가 더 지독하고 더 깊은 상처를 낸다는 것을, 사람의 정신세계를 너덜너덜하게 난도질한다는 것을, 나 역시 경험해 보지 못해서 잘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생을 마감한 고 이예람 중사 역시, 기사에 따르면 '2차 가해'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부서장에게 신고하면 성범죄 사건이 절차대로 처리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피해자는 상당한 좌절과 함께 무력감을 느낀 것으로 보이고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
재판부의 이 지적을 보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강하게 공감이 갔다.
나 역시 믿음을 가졌었고, 믿음의 크기만큼 좌절과 무력감을 느꼈으니까. 무력감.. 이게 사람을 말려 죽이는구나.
2차 가해자들은 조금이라도 알까? 자신의 세치 혀로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사람의 운명을 처참하게 가를 만한 해악을 끼쳤다는 것을.
한 논문에서 정의 내린 2차 피해는 다음과 같다.
'성범죄 피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탕으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표현이 이루어짐으로써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고통' '2차 피해 유발행위는 작위뿐 아니라 부작위에 의해서도 저질러질 수 있다.'
그리고 여성가족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나는 5)를 침해당했다.
◎ '2차 피해'의 정의 (여성폭력 2차 피해 방지 지침 표준안, 여성가족부 1.25)
1) 파면, 해임, 해고, 그 밖에 신분 상실에 해당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조치
2) 징계, 정직, 감봉, 강등, 승진 제한, 그 밖에 부당한 인사조치
3) 전보, 전근, 직무 비부여, 직무 재배치, 그 밖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인사조치
4) 성과평가 또는 동료평가 등에서의 차별과 그에 따른 임금 또는 상여금 등의 차별지급
5) 교육 또는 훈련 등 자기계발 기회의 취소, 예산 또는 인력 등 가용자원의 제한 또는 제거, 보안정보 또는 비밀정보 사용의 정지 또는 취급자격의 취소, 그 밖에 근무 조건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차별 또는 조치
6) 주의 대상자 명단 작성 또는 그 명단의 공개, 집단 따돌림, 폭행 또는 폭언, 그 밖에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
7) 직무에 대한 부당한 감사 또는 조사나 그 결과의 공개
8) 인허가 등의 취소, 그 밖에 행정적 불이익을 주는 행위
9) 물품계약 또는 용역계약의 해지, 그 밖에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조치
이 같은 2차 피해를 가한 행위자는 형사 처벌된다. 그런데 나와 그 교수는 학회라는, 학회 소속 연구회라는 헐거운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발생한 것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 교수의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할까, 전단지라도 뿌릴까, 학회 총회에서 폭로할까... 생각해 보지만, 무엇을 하려 해도 내 주변에 날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다 말린다. 너만 다칠 거라고.
세상은 여성에게,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는 관대하지 않다고.
권력 있는 그 교수와 안정적 직업과 경력이 있는 가해자를 더 신뢰할 것이고, 아직 마땅한 직업조차 없는 나는 그저 성격 더러운 애로 찍혀 취직도 못하고 점차 학계에서 찾는 이가 없어져 결국 자연스럽게 퇴출될 것이라고.... 맞는 말일 것이다.
....나도 무섭다. 유학까지 다녀와서... 30대의 절반을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에서 나쁜 머리 싸매면서, 코피 흘려가며 공부했는데...밟힌 지렁이처럼 꿈틀 한 번 해보려다가...학자로서의 삶을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날까봐.
내가 바라는 것은 사과와 잘못된 조치의 철회인데... 아니, 사과도 필요 없다. 그냥 나를 조직에서 나가라고 한 그 잘못된 조치만 철회하기를 바라는 건데...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그 교수는 나처럼 힘이 없는 사람의 비명 소리쯤은 모기 소리 정도로 들리나 보다.
...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는 찬 바람 불 때 까지는 다녀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찬 바람 불었는데 그만 오라는 말씀을 안 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