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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Oct 14. 2022

모대학의 대자보_"저는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 피해 이후 경험의 데칼코마니

강의를 나가고 있는 서울 소재 모 대학에 이런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학생 대표자에게 고함"


별 관심 없이 지나치려는 찰나, 첫 문장이 내 발길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OO대학교 학우 중 하나인 O입니다. 저는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처음에는 이 학생의 대자보 내용이 가해자인 교수나 교직원, 또는 학생의 성폭력 가해 사실을 고발하려는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자보의 목적은 조금 달랐다.


"현재 대외적인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론화를 위한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피해를 '혼자서'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필요했던 것이 있었기에, 이 글을 통해 학생 대표자분들께 호소합니다....(중략)... OO대학교에는 성평등 자치기구, 혹은 반성폭력 기구가 필요합니다."


학생은 자신의 대학 내 성폭력 피해 경험을 통해 가해 당사자와의 분리된 삶을 위해, 일상 회복을 위해 자신이 감수해야 했던 어려움들에 대해 알리며 곧 있을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적절한 기구를 만들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저는...(중략)... 가해자를 징벌하고 싶다는 욕구보다 일상의 회복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습니다.


...(중략)... 가해자와의 분리를 위해 모순적으로 가해자와의 연결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가해 당사자에게 현재 당신으로부터의 성폭력 피해를 인지하고 있고, 이에 대해 개인 SNS 계정에 공론화할 것이며, 당신과 삶을 분리하고 싶고, 따라서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해야만 했습니다."


...(중략)... 제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의 신상 노출이었습니다. 피해자 스스로 피해자의 이름을 밝혀 공론화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중략)... 2차 가해는 발생하지 않을까 많은 걱정이 있었습니다.


...(중략)... 더 이상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가 막막함과 막연함의 바다에서 부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폭력의 문제는 어쩌면 익숙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언론에 등장한다. 하지만, 사건 발생에 대한 충격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이후의 처리과정까지, 문제가 해소되는 끝 지점까지 관심을 놓지 않는 언론이 있었나 싶다.


언론뿐만이 아니라, 그런 소식을 접한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거나 불쾌감을 표하거나 피해자를 위로하거나... 아니면 피해자를 의심하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지만, 그 이후의 과정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학생의 호소가 더 절절하게 와닿았다. 개인의 불운(불행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니까)에서부터 구조적 개선의 방안을 도출하고자 하는 노력도 애틋했다.


무엇보다도, 이 학생의 문제의식이 지금 내가 대학 밖인 학계에서 겪고 있는 상황과 데칼코마니 같아서... 답답했다.


나 역시 '대외적인 문제'는 내 손을 떠났다. 불송치되었고 앞으로도 법적으로 내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 더욱 중요했던 가치도 '가해자를 징벌하고 싶다는 욕구보다 일상의 회복에 대한 욕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직접적인 가해 보다도 2차 가해가 떠 뼈아팠고 지금도 병원을 다니는 이유이다.


또한 나 역시 '가해자와의 분리를 위해 모순적으로 가해자와의 연결'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만 떠올려도 토할 것 같은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나였다. 아무도 나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고 혹은 나와 함께 해 주지도 않았다.


가해자에게 요구한 내용도, 내가 '성폭력 피해를 인지'하고 있고 '공론화' 할 것이며 '삶을 분리하고 싶고', 따라서 '협조'부탁한다는 것까지 매우 유사했다. 조직의 장이나 책임자가 함께 해 주지 않을 때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또한 지금 나는 '스스로 피해자(나)의 이름을 밝혀 공론화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다. 내가 신뢰하여 상황을 공유했던 사람들로부터의 '2차 가해'는 벌써 일어났으며 만약 내가 연말에 학회 총회 자리에서 공론화를 한다면 2차 가해는 더 심각하게, 나의 생계와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발생할 수도 있다.


아직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할지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런 방식까지 고려하고 있는 이유는 '막막함과 막연함의 바다에서 부유'했을/하고 있을/앞으로도 하게 될 성폭력 피해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대자보를 붙인 학생이 만약 나의 친구라면... 안타깝지만 이렇게 얘기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슬프지만... 학교 밖도 여전히 그래. 다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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