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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Nov 15. 2022

성폭력피해자의 선택지: 우울한 사람 vs. 괘씸한 사람

내 자리가 있던 모 대학의 연구소에서 짐을 싸서 나온 후, 거기에 계시던 분들과는 그분들의 의지에 의해 연락이 끊어진 상태이다. 내가 2차 가해를 따져 묻고 있는 ㅇ교수는 내 연락을 간단히 무시하고 계시고... 내가 그래도 연락하고 지낼 수 있다고,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 박사님도 내 이메일에 답을 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얘기를 들었다.

그분들이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짐을 싸서 나간 나를 '괘씸하다고 생각'하신다고.   


괘씸. 괘씸이라...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 말을 전해 준 분 앞에서 나는 황당+분노하여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허! 진짜 어이가 없네..."


그 말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괘씸? 누가? 내가? 내가 그들을 괘씸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괘씸이라는 말이 보통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의 행실을 두고 하는 말이라 좀 어색할 수는 있지만,

사람이 아프다고, 괴롭다고, 고통스럽다고, 빼앗아 간 내 것을 돌려달라고 몇 달 동안 발버둥 치다가 튕겨져 나왔는데... 그런 내게 '괘씸'하다고?


일단, 나는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짐을 싼 것이 아니다.

몇 번을 묻고 말했었다. 내가 이 연구소에 계속 나오는 것이 부담스러우시냐고, 내가 나가길 원하시는 거냐고, 요즘 교수님이 나를 대하는 것이 전과 달라 혼란스럽다고. 말로도, 카톡으로도, 편지로도...  그럴 때마다 아무 말씀 없으시거나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상황을 회피하셨다. 그렇게 나는 몇달 간 방치되어 있었다


짐을 싸기 이틀 전에도 두 분께 이런 상황에서는 더 있을 수 없다고, 나가겠다고 이메일을 보냈었다. 아무 답이 없으셨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난 '하루아침'에 아무 '말도 없이' 소중한 인연을 끊은 괘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감정이 좀 가라앉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2차 가해를 따져 물은 o교수가 아닌, 나와 ㅇ교수 사이에 끼여 있던 박사님은 어쩌면... 내가 박사님과 같이 밥 먹고, 그분 앞에서 웃고, 일상을 이야기하고 지냈던 것을...  내가 진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고...


진짜 진짜 이해심을 넓혀서 생각해 볼 때 가능한 추론이다.


그래도... 내가 이 나이 먹고 박사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게 몇번인데...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호소하며 보낸 이메일이 몇 통인데... 신경정신과를 몇 달째 다니 약에 의존하여 지내는 것을 아시면서도... 설마 내가 진짜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지내고 있고 생각하셨다고?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나를 괘씸하다고 하시니 할 말이 없네.


내가 그분 앞에서 매일매일 우울하고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 한 번 웃음을 쥐어짜기 위해 혼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겨워했을지... 60세가 넘으신 그분은 아주 조금이라고 아실 줄 알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날 지켜본 분이기에... 당연히 아실 줄 알았다. 나의 '웃음'이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아주 조금이라도 아실 줄 내가 착각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하나? 나중에 이렇게 괘씸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당시의 쓰나미처럼 몰아치던 감정을 '일상'을 살고자 하는 노력과 '웃음' 뒤로 숨기지 말고 다 드러냈었어야 하나? 만약 그랬다면 우울한 사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 개인의 일로 조직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내게는 조직 안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우울한 사람이 되느냐... 참다 참다 조직을 뛰쳐나온 괘씸한 사람이 되느냐... 이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네.


물론, 2차 가해 속에서도 방긋방긋 웃으며 끝까지 꾸역꾸역 살아내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분들이 바라는 선택지였겠지만...


나는 로봇이 아니므로. 나는 사람이므로. 그 선택지는 불가능했고, 앞으로도 불가능하고, 지금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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