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하던 약자 및 소수자들의 경험과 그전에는 조명받지 못하던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을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무지개의 색깔도 한국에서는 일곱 빛깔이라고 인식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다섯, 혹은 여섯으로도 인식되는 것처럼,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존재하는데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들을 새로운 눈과 기준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니까.
과거 여성들이 결혼 후 집안일을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가사노동'이라는 개념이 정립되면서 그 금전적 가치를 환산하기도 하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부부강간'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엔 술자리의 우스갯 소리 정도로 소비되던 개념 아니었나?
꼭 집 안의 일들 뿐만 아니라 '감정노동'이나 '번 아웃'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개념화되지 않았던 것들이 명칭이 정해진 후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게 된 것들이다.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된다 하지 않았나...
살짝 학문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문제화(problematization)'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화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희생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기, 투쟁이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졌을 때 문제화가 시작되고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되고, 또 국가의 정책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인 만큼 그 정의가 명확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 간의 합의 수준도 천차만별 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또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악용될 수도 있다.
다만, 남용되고 악용된다고 해서, 그 개념을 공론화되도록 노력한 사람(혹은 사람들)의 진의와 그 개념이 필요해진 시대적 요구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그건 지금까지 발생한 희생자들, 잘못이 없으면서도 고개 들지 못하고 움츠리며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을 모른 척하고 계속 양산해 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용과 악용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그것 역시 이제야 겨우 개념화되어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의 진보에 대한 anti-세력의 손에 무기를 쥐여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2차 가해'가 오늘날 그런 상황에 놓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중요한 개념이다. 내가 겪어보니... 내 몸에 직접적으로 손을 댄 그 XXX 보다, 나에게 말로, 행동으로, 권력으로 나를 배제시키고 조직에서 밀어낸 사람이 더 큰 고통을 주더라. 그래서 '2차 가해'라는 것이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무섭고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대가 '2차 가해'를 하겠다는 의도가 없었더라도 말이다. 사람을 차로 친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더구나 차에 치인 사람이 아프다고 소리치는데 '왜 저래?'라고 하며 무시한다면, 그것은 뺑소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가해'와 성인지 감수성 떨어지는/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언행에 대한 불쾌감과 당혹스러움 등은 구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들도 주관적인 감정이 섞여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모든 사례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2차 가해인지 아닌지 정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같은 말이라도 발화자와 청자 간의 라포(rapport: 마음의 유대)가 형성된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판단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내게,
"내가 ㅅ박사랑, ㅇ교수를 아는데, 훌륭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성폭력과 2차 가해?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것을 2차 가해라고 명명하겠다. 왜냐하면 이 말에 의하면, 나는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내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하자마자, 첫마디로 "그날 술 마셨어요?"라고 되묻는 것도 2차 가해라고 명명하겠다. 내가 술을 마신 것이 성추행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가장 큰, 앞선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해자가 술을 마셨다는 것 역시, 피해는 내가 입었는데 가해자의 잘못 여부를 그의 음주여부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실제로 이 말을 60이 넘은 아저씨한테 들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고 불쾌했지만 그냥 넘어갔었다. 내가 신뢰하던 아저씨니까... 시대에 뒤떨어진 그의 감수성을 이해하면서 넘어갔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ㅅ박사랑, ㅇ교수를 아는데,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사람들이 그랬다는 것이 믿기가 힘드네요. 괜찮다면 혹시 그날 상황을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설명을 할지 말지를 상황에 따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완전히 안심하거나 편안한 마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내가 믿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는다면 바로 믿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게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의 피해 여부를, 당사자도 아니고 신도 아닌,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춰서 가능한 만큼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삼자의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박원순 시장과 얽힌 사건의 경우,
"삶의 궤적을 보면 박원순 시장이 잘못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을 한다면, 나는 이것은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삶의 궤적'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상상으로 그 사람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말은,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완전한 거짓으로 예단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가해'라고 느낄 수 있다.
또 대외적으로 '훌륭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는 '훌륭하지 못한' 피해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훌륭함'의 정도로 피해 및 가해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된다(좀 다른 맥락이긴 해도, 대외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간디도 흑인들을 비하했고 링컨도 흑인노예를 부리며 살았다...). 그리고 피해자는 상대적으로 가해자보다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은데... 가해 및 피해 여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아오면서 쌓은 업적'을 통해서 평가 및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전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라던가, "가해 여부는 안타깝게도 박시장의 사망으로 영원히 미궁에 빠져버렸습니다", 혹은 "편지 등에 남아 있는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흔적을 보면 함부로 박시장의 가해 사실을 단정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등은 듣는 사람에 따라 불편, 불쾌, 속상할 수는 있으나 2차 가해라고 명명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판단의 차이니까.
이러한 판단 및 질문들을 모두 '2차 가해'라고 명명한다면, 우리 사회의 성 담론, 성폭력 담론은 여기서 멈추거나 과거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의문과 질문을 통해 사회적 합의의 수준을 높여가지 않는다면, 의문과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물론, 제발 신중하게, 정중하게 좀 하자...), 아직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2차 가해'라는 개념의 칼자루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권력자들과 지식으로 무장한 채 권력을 쥐고자 하는 자들의 손에 돌아가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푸코는 권력과 지식은 상호작용하는 복합체라고 했다).
어려운 문제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판단을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비록 어정쩡하게 느껴져 불편하더라도. 동시에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조심성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뢰하던 하지 않던, 적어도 진위가 밝혀지기 전 까지는.
사람들은 흑과 백 중 어느 한쪽에 속해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얻도록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옳고 남이 틀린 상황에서 가장 심리적으로 큰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틀린 것은 속상하니까.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불안정함은 못 견디게 불편하니까.
하지만 때로는, 알수 없을 때는 판단을 멈춘 채, 불안정함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견디면서,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더 큰 아픔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어른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박원순을 믿는 사람들'의 등장이, 이들의 다큐제작이 걱정되고 두렵다.
나는 피해자로서,
나를 사적으로 잘 알아서 나의 말을 신뢰해 주며 함께 아파해 주는 친구들 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잘 몰라서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게 예의를 다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친구가 될 용의가 있다.
상황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이 신중하게, 그리고 피해자인 내 앞에서 정중하게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피해호소인'이란 말이 정치권에서 문제시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표현이 2차 가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배가 침몰했을 때, 시신이 발견된 경우에 그 가족들은 '유가족'이 되지만, 안타깝게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실종자 가족'에 머무는 것처럼, 가해자라고 지목받던 사람이 사망하여 법적인 판단이 멈춰졌을 때, 나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분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피해호소인 혹은 피해주장인으로 불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유가족이 되고 싶습니다"라며 자녀의 생사를 확인해 달라고, 시신이라도 찾아서 수습해 달라고 울부짖던 부모님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