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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Jun 19. 2023

처음으로 입을 연, 또 한 명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 그대를 응원합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며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내가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내 피해 사실을, 비교적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마치 '나 길 걷다가 넘어진 적 있잖아' 라든가 '기차에 지갑 두고 내린 적 있어'와 같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이나 잠깐의 불운처럼.


한 달 전쯤에도 알고 지낸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직장동료에게 내 책을 선물했다.

내 책이라기보다는 '우리' 책 '허들을 넘는 여자들'

왜냐면 그 전날 그 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다른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그 동료가 내가 성폭력 피해생존자라는 것을 안다면 좀 당황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뭐 그냥.

그냥 많은 생각하지 않고, 말 나온 김에 책을 선물해 줬다.



그런데 며칠 뒤, 그 동료는 내게 새빨간 립스틱을 선물해 주더라.

그녀가 말하길, 자신도 성폭력 피해를 입었었고... 새빨간 립스틱이 바르고 싶었단다.

아...

그랬구나. 그녀의 절절한 공감능력에는 또 그런 배경이 있었구나.


이후 그녀와 순댓국과 소주 한잔... 이 아닌 각 1병씩 하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진지하지 않았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남들 뒷담화도 하고... 연애 얘기도 하고... 일 얘기도 하고... 또 성폭력 얘기도 하고... 그랬다.


그녀는 아직 성폭력의 기억이 많이 아픈 것 같았다. '허들을 넘는 여자들'을 읽고 그날 밤 한 숨도 못잤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피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알겠더라. 그녀는 어쨌든, 언제가 되었든, 그 기억을 딛고 마침내 일어설 것이라는 걸.

왜냐면, 입 밖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녀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마치 양손으로 고무공을 휙휙 던지며 저글링 하듯이,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전에 내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던 또 다른 친구에게 썼던 편지를 그녀에게도 보낸다.

응원과 함께:)



그건 그렇고...

난 우리나라 성폭력 피해 신고율이.... 1/10 정도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게 자신의 피해를 공유했던 많은 친구들, 동료들 중... 대부분은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약한... '전형적'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대부분 가방 끈도 충분히 길고, 가질 만큼 가졌고, 자신의 주관도 뚜렷하고, 사회생활을 할 만큼 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만큼은... 그저 나에게 이야기하고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며 견뎌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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