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들로 May 26. 2018

홀로 간직해야만 하는 편지
<러브레터>

혼영일년 2月 : 혼자서 꿈꾸는 겨울 로맨스 4

하얗게 펼쳐진 나가노 설원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을 내딛는다.  

가슴에 그를 묻은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떠나보내려 한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그에게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애써 외친다.

 

오겡끼데스까 / 잘 지내고 있나요 


<러브레터>는 세상을 떠난 한 남자를 두 여자가 편지를 통해 알아가는 이야기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3년 전 연인 후지이를 조난사고로 잃지만 그를 잊지 못한다. 히로코는 후지이의 중학교 졸업앨범 주소로 편지 보내는 걸로 그리움을 대신한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답장이 온다. 바로 연인 후지이와 동명이인인 중학교 동창 후지이(나카야마 미호, 1인 2역)가 보낸 것이다. 히로코는 후지이에게 연인의 학창 시절에 대해 얘기해달라 부탁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편지에는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있다. 둘이서 주고받으며 편지는 완성된다. 

히로코는 연인 후지이에 대해 묻는 편지를 쓰고, 후지이는 동창 후지이를 알아가는 편지로 답한다. 

편지처럼 묻고 답하면서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같다.  

후지이는 동창 후지이가 실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히로코는 연인 후지이가 첫사랑과 자신이 닮아서 자신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받는 이가 없으면 편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남자 후지이는 여자 후지이에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건넨다. 여자 후지이는 남자 후지이가 책 대출카드 뒷면에 쓴 러브레터를 받지 못한다. 뒤늦게 알게 된 여자 후지이가 대출카드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으려 하지만 넣을 수 없다. 이미 남자 후지이는 세상을 떠났고, 여자 후지이는 대출카드를 다시 책에 꽂을 수밖에 없다. 남자 후지이의 러브레터는 안타깝게도 수신되지 못한 첫사랑으로 멈춘다.  

어쩌면 남자 후지이, 여자 후지이, 그리고 히로코 모두 러브레터를 완성하지 못한 먹먹함과 그리움으로 차디찬 겨울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겡끼데스까 / 잘 지내고 있나요 


히로코는 죽은 후지이가 있는 설산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수신되지 못할 러브레터를 보낸다.   

하얀 설원에 히로코의 안부 인사가 울려 퍼지는데 끝내 후지이는 대답이 없다.

   

왓다시와 겡끼데스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히로코는 말한다.  

그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던 히로코가 자신은 잘 지낸다고 건넨다. 그의 죽음이 드리운 어둠에 갇혀 살았던 히로코가 애써 자신은 잘 지낸다고 외친다.  

사랑하는 이가 영영 떠난 자리에서 러브레터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한 장의 종이에 그친다. 

그래도 히로코는 수신되지 않을 러브레터를 마지막으로 쓴다. 나 잘 지내고 있다고. 나 괜찮다고... 

히로코가 마지막으로 쓴 러브레터는 떠난 그에게 보내는 안부가 아니라 지금까지 잘 버틴 나에게 건네는 위로일 테다.   


둘이서 주고받던 편지를 홀로 간직해야 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고 수신처 없는 편지를 지니고 살아가야만 할 때가 있다. 

편지를 그저 지니고만 있어도 괜찮다. 언젠가 살다가 문득 그 편지를 꺼내보는 날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기억으로 썼던 편지를 사랑했던 추억으로 꺼내보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땐 편지를 보며 활짝 웃어 보이는 내가 되고 싶다. 

그 편지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지난날들을 잘 버틴 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일 테니까. 



# 혼자서 잘 버티고 있는 나는 웃을 자격이 있다. 




추신)  

<러브레터>는 절절한 감성과 순백의 영상미와는 달리 개봉 당시 우여곡절이 있었던 작품이다.  

반일 감정으로 금지되었던 일본 문화 개방은 1998년에야 이뤄진다. 1999년 개봉작 <러브레터> 또한 당시 방송위원회에서 “광고는 국민의 자존심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심의 규정에 따라 TV 광고가 금지됐다. 복잡했던 한일 관계와 달리 영화는 “오껭끼데쓰까” 로 한국 관객의 감성을 적셨다. 

두터웠던 한일 국경을 뛰어넘은 것은 결국 이와이 슌지 감독의 보편적인 감성과 영상미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젠가 시상식의 주인공이기를 <라라랜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