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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유 Feb 09. 2018

어쩌다 그는 이방인이 됐나

알베르 카뮈, 이방인


당신은 큰 불행에 처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이가 죽습니다. 그는 당신이 처한 불행의 씨앗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요? 그가 죽는다고 해서, 당신의 불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감정의 동요도 없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처한 불행의 씨앗을 제공한 그 사람, 그 사람이 어머니라면, 그리고 그 어머니가 죽었다면, 당신은 어떨까요?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이란 비보로부터 시작합니다.



감정이 배제된, 사건으로서의 죽음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인지도.’


이방인의 첫 구절은 이방인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문구입니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는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인데, 이것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 뒤에 나오는 ‘어쩌면’입니다. 이 ‘불확실성’이 담긴 부사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확정된’ 사건에 담긴 슬픔을 지워버립니다. 어쩌면, 어제 인지도 모른다. 화자의 이담 담한 태도는 이 작품의 종장에서 그가 사형 판결을 받는 데 대단한 영향을 미칩니다.


작품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뫼르소의 회고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연을 가진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무심한 남자를 아들로 둔 한 노모로서 나오죠.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구도적으로 어머니-아들의 관계만 보여줄 뿐입니다.


뫼르소는 장례를 치릅니다. 장례 내내 뫼르소는 지루해합니다. 빨리 이 절차가 끝나길, 절차가 마무리되어 어머니의 죽음이 문서상으로 확정되길 기다립니다. 요양원을 설명하는 양로원 수위가 입을 닫았으면 하고 바라고, 악담을 하고 싶은 욕구가 목 밑까지 차오르죠. 그렇게 뫼르소는 장례를 끝냅니다. 장례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심지어 그는 이제 실컷 잘 수 있겠구나, 하고 기뻐합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핑계로 회사에 연차를 냈는데, 그 연차 일과 주말이 겹친 바람에 연일로 쉬어버린 겁니다. 뫼르소는 혹여 ‘어머니 장례를 핑계로 내가 놈팽 이질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그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피투성


‘부조리’로 대표되는 카뮈의 사상을 이해하면 보다 재밌게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죽는 건 선택할 수 있지만, 태어난 건 선택할 수 없지요. 그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런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카뮈는 ‘부조리’와 ‘죽음’ 사이에 있는 문제를 굉장히 중시 여겼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시지프스의 신화’ 첫 구절이 이러할까요. “참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가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참고로 카뮈는 대중교통으로 가겠다는데 굳이 자동차로 태워주겠다는 갈리마르 출판사 직원의 차를 얻어 타고 가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47세의 일기를 마감합니다.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의 주된 화두에는 늘 ‘부조리’가 있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부조리한 것이 많지요. 실존주의 입장에서 부조리는 인생의 일부를 넘어선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왜 부조리를 겪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원류를 따라 떠난 모양입니다. 신은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왜 있는가, 왜 우리를 만들었는가. 하지만 신은 답하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지요. 신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누가 나를 던졌는지는 알지요. 바로 ‘어머니’입니다. 카뮈는 말합니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부조리는‘피투성(던져짐)’에 있다. 세상에 던져진 뫼르소는 이렇게, 세상에 자신을 던진 존재(어머니)의 죽음을 정리(장례)했습니다.



패륜아와 태양



뫼르소는 참으로 패륜아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머니를 불행의 씨앗으로 보다니요, 참으로 후레자식입니다. 장례를 끝낸 뫼르소는 바닷가로 떠납니다. 거기서 우연히 옛날에 함께 일했던 여직원 마리를 만나지요. 그 둘은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잠을 잡니다.


그러던 어느 날, 뫼르소는 레이몽이라는 남자와 친구가 됩니다. 레이몽은 여자를 패고, 싸움을 즐기는 천하의 개 쌍놈입니다. 천하의 개 쌍놈과 패륜아는 급속도로 친해지고, 마리와 함께 레이몽의 친구가 별장을 갖고 있다는 바닷가로 놀러 갑니다.


그러다 뫼르소는 레이몽과 단 둘이 걷던 중, 해변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무리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바로 예전에 레이몽 과다툰 적이 있던 아랍인 패거리였습니다. 레이몽이 말합니다. 이 총으로 겁만 주자고. 그다음 저들을 힘껏 패주자.


뫼르소는 그 총을 봅니다. 태양이 눈 부신 날, 그렇게 뫼르소는 그 총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뫼르소 meurso는 프랑스어로 살해를 뜻하는 ‘meurtre’와 태양 ‘Soleil’의 앞글자를 조합한 이름입니다.



태양이 눈 부셔서 죽였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묻습니다. 피고는 아랍인을 왜 죽였는가, 그가 답합니다. 태양이 눈 부셔서.


태양이 눈 부셔서 아랍인을 죽였다는 건 이방인의 첫 문장만큼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논리 따윈 없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사실이 있습니다. 그 태양은 눈부셨고, 뫼르소는 방아쇠를 당겼고, 사람은 죽었습니다. 전반부를 이끌어간 것이 부조리와 죽음. 그 앞의 담담함이었다면 후반부를 이끌어간 것은 이 몰이해, 아이러니입니다.


뫼르소는 법정으로 끌려갑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중죄죠. 하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아닙니다. 뫼르소는 초범이었고, 전과도 없었으므로 길어야 10년이었을 겁니다.


초기 재판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재판정에 개입되면서, 재판의 양상은 바뀝니다. 바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입니다. 적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다양한 증인이 동원되는데, 갑자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증언이 쏟아집니다.


뫼르소 그는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애인과 시시덕거리더군요. 그는 일반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슬퍼하긴커녕 그 죽음을 기다렸다는 것 같았다고요. 장례식장에서 그는 전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냉담했고, 심지어 나이도 몰랐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이 피고는 어머니가 죽은 바로 다음 날 부정한 남녀관계를 맺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해수욕을 즐겼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어마 무지한 사건을 겪었는데도 뫼르소는 무서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지 않느냐는 반증이란 겁니다. 그러니 그런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보다 더 진중하게 고민을 해 봐야지 않겠느냐는 거였죠.


화두는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에서 ‘그는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로 넘어갑니다. 중간에 누군가가 손을 들고 외칩니다. “지금 피고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재판정에 서 있는 겁니까, 어머니가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았다고 서 있는 겁니까?”


재판은 단순한 살인행위에서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패륜적인 무의식을 가진 자의 악독한 살인으로 넘어갑니다. 애당초 영혼조차 존재하지 않고,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악인으로 뫼르소를 몰아갑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재판은 뫼르소의 사형 선고를 위해 나아갑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죠. 태양이 눈 부셨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단 거나, 어머니가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이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재판이나,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습니다. 극과 극은 참으로 맞닿아 있군요. 그야말로 부조리의 정점입니다.


이렇게 뫼르소는 사회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는, 마땅히 격리되어야 할 이방인(stranger)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뫼르소는 끝끝내 반론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법정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사죄를 했더라면 그의 살인죄는 참작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연인 마리와의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뫼르소가 한 반론은 고작해야 “아랍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입니다. 종장엔 수형자로서 뫼르소가 혼자 하는 독백과 생각이 많습니다. 거기서, 뫼르소는 꽤 많이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지요. 그 고민 끝에 뫼르소가 내린 결론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이 정도입니다. 그 명제만 뒤집고, 그것을 증명한다면 뫼르소는 살 수 있었을 텐데요. 사형수가 된 뫼르소는 죽음이 다가오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무너지고, 아파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역설적인 일이지요. 그렇기에 많은 갈래로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뫼르소는 말합니다. 내가 죽음을 맞이할 형장에서, 사람들이 나를 보다 열렬히 증오해주기를.


이렇게 뫼르소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본인의 부조리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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