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15
만년필은 여전하다. 고장이다. 먹이 샌다. 채우지 않는다. 잉크를 콕콕 찍어가며 쓴다. 새 펜을 장만할까 싶다가도, 옛 깃펜처럼 찍는 매력도 괜찮아서 둔다. 여분을 쟁이지 않고 정량만 두는 성격은 때로 짜증스럽다. 언젠가 불가피한 필요가 생길 것임을 알지만, 당장 쌓기 싫어서 죄다 치운다. 유려한 발음은 만인의 소망인가. 당신도 영어 술술 말하기를 바라고, 이직 준비하는 동기도 스피킹 강의 듣는다. 매일 회화 영상 따라 하는 나야 할 말 없고. 고등학교 제 2 외국어 선택 때 곧 중국어 시대가 온다느니, 들은 법도 한데. 체감은 아직 영어가 압도한다. 팁을 전한 B 언니를 떠올린다. 캐나다 약사 준비하고,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는 언니.
학과 선배로 만난 초반부터 결이 닮아 편안했다. 몇 발 앞서 인사이트 제공했다. 언니와는 병원 출근 전 오전 일곱 시 통화가 마지막이다. 시차 감안해 시간 정했다. 진로 상담 겸할 참이었다. 퇴사 고민하며 눈물 한바탕 쏟았다. 병원 근무는 기억으로 남은 형체가 없다. 듬성듬성 구멍 난 천 사이로 지난 시간 힐끗 내다보는 감각인데, 순간들은 정지한 상에 엉망진창 표독스러운 소음만 들린다. 전장이 이곳인가 싶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질 따름이다. 수화기 대고 펑펑 울어 재낀 날, 퇴사를 결심했다. 언니는 별말 없이 위로했다. 병원 밖은 넓다 그랬다. 그러고서 누구보다 넓게 살아간다. 넓히며 살아가고 싶으니까.
동기 Y는 포항에 거주하며 경주로 출퇴근한다. 우리는 가끔 통화한다. 토요일 아침 여덟 시쯤. 나는 매트리스에 누워서, Y는 출근길 운전하며. 둘 다 잠에 덜 깨 헛소리 나누면 사십 분은 쏜살같다. 약국 도착한 Y는 도살장 들어가는 소처럼 슬퍼하며 주말에도 일한다. 외할머니는 기침하자마자 당신께 전화 걸어 첫말을 나누고 하루를 시작한다지. 전화통 붙들며 살기 싫지만 꼭 걸고 싶을 때도 생기기 마련이다. 찬란한 하늘 아래 걸으면 더더욱. 집에 돌아가는 길은 유독 당신과 입말 나누고 싶어져, 자전거 타면 몇 분만에 도착할 거리를 괜스레 서성인다. 목소리만 듣고도 든든할 사람이 곁이라 다행이다. 비록 시애틀에, 포항에, 마산에 살지만 전파 닿는 지구에 공존하니. 전화할 데가 어디도 없으면 제법 쓸쓸해져, 화분 앞에 혼잣말할지도. 만년필이 빈 종이를 시꺼멓게 채워버릴지도 모르겠다.
240311
1. 아무 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쓸쓸해진다, 질까?
2. 유려한 발음으로 영어를 술술 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