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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의 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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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Oct 08. 2024

검은 머리 짐승

240919

날이 좋아 터럭을 자른다. 검은 풀이 낭자한 바닥 밟고 앉는다. 하얀 천을 두르고 추호를 분수처럼 떨군다. 휘어 자란 허리 끊자 무딘 끝이 칼칼해진다. 하늘보다 파란 반팔을 입는다. 조우한 둘은 하필 새빨갛다. 짜맞춘 듯 원색이야. 불합한 대척 구도다. 초행은 헤맨다. 아트나인을 찾는다. 관성 따라 오른다. 막힌다. 비상계단으로 빠진다. 난간 사이 빛이 내린다. 황홀하다. 촉박하다. 카메라는 가방에서 잠잔다. 눈꺼풀로 쩔꺽, 셔터를 누른다. 목에 걸면 찍었을까, 그저 찬탄했을까. 쨍한 창공에서 남산 타워 스치며 낮게 떨어지는 볕을. 악착같이 집어 올려도, 시각이 대뇌에 현상한 순간만큼 탁월하지 못하겠다. 실력은 눈높이 아래다. 보는 만큼 담지 못하는데, 의외를 포착해 결과는 들쭉날쭉하다.


길치의 소치로 5 분 늦게 입장한다. 도입부를 놓친다. 어떤 문장은 성큼, 예고 없이 머릿속에 들어앉는다. 어떤 영화는 불쑥, 오감으로 물밀듯이 다가온다. 스크린 너머는 모조리 기지다. 온도, 습도, 조명, 심지어 냄새까지. 아궁이 불 때어 연기에 그을음 얽히니, 밤공기 쌀쌀해도 습기 가시지 않아서, 소슬한 팔뚝에 겉옷 옅게 들러붙고, 매캐한 코끝 시리게 문지르며, 부스스 일어난 추석날 아침. 홑이불과 덩그러니 까치집 짓고, 미적미적 타들어 가는 제사상 향을 안다. 알고 싶지 않다. 콩가루는 남일 같지 않다. 영화 <장손>은 남 집 같지 않다. 우리가 이해해야지. 그렇게 태어났잖아. 평생을 살아왔잖아. 납득 안 간다. 배움을 탐하여 멀리 간다. 달무리가 얼룩진 땅이다. 낡은 자락을 슬그머니 떼어낸다. 짐승은 털갈이가 필요하다.


240315
1.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잔뜩 떼어 내다간 서른쯤 되었을 땐 남는 게 없단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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