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구 Oct 24. 2021

바람 부는 날들

가을의 짧은 여행

 온 동네를 뒤흔드는 바람소리에 나는 잠이 깼다. 역시 제주도는 제주도인가 봐, 바람이 이렇게 부는 걸 보면. 7년 전 3개월가량 제주에서 먹고 자며 지냈던 때를 새삼스레 떠올렸다. 그때도 참 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했다. 특히 바닷가 바로 앞에 자리한 숙소여서 더욱 바람이 거셌다.

 가져온 옷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어떻게든 몸을 꽁꽁 여매고는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코앞 거리였는데도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던지 몇 번이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다 바람이 좀 덜하면 다시 걷고를 반복했다. 도저히 속도가 안 나서 아예 뒤를 돌아서 등으로 바람을 맞대고 걷기도 했다.


 숙소지기가 강력 추천이라고 말했던 식당 보말칼국수는 고소하고 담백했고, 가게 안엔 온갖 유명인사들의 싸인 종이와 추천사가 곱게 코팅되어 가득 붙어있었다. 나는 혼자서 칼국수의 국물을 호로록 떠마시며 창밖을 구경했다. 여전히 바람이 많이 불고, 자잘한 빗방울도 좀 떨어지는 듯했다. 어디 먼 곳을 나가기보단 그냥 가까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최선이겠다 싶어 바로 길 건너편의 카페로 갔다. 홍차와 타르트를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작년 3월쯤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에 침투할 무렵부터의 기록이었다.

 코로나 말고도 내 삶엔 얘깃거리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속이 답답할 때나 삶이 막막할 때, 둥실둥실 기분이 좋을 때도 시시콜콜 일기장에 뭔가를 적어뒀고, 그 과거의 기록은 나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휴가라고 이름은 달아뒀지만 거창할 게 없었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예쁘게 꾸며 놓은 카페에 가서 일기장을 읽었다. 비바람이 몰아쳤고, 카페를 나설 때쯤엔 사장님이 우산 없냐며 걱정하시길래, 바로 앞에 길 건너편이 숙소라 괜찮다 말하고 또다시 옷을 잔뜩 여민 채 거리로 나섰다.

 뒤를 돌아 엉거주춤 발을 뒤로 내딛으며 숙소로 걸어갔다. 누군가 보면 나는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었겠지만, 나는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우도에는 '밤수지맨드라미'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다. 이 이름은 원래 멸종위기 산호초의 이름이라는데, 사장님은 이것이 책의 모습과 닮은 것 같아 이렇게 이름을 짓고 책방을 열었다고 했다. 나는 그냥 훑어보던 사진집이 기억에 남아서 결국 구매했는데 <입도조>라는 책이었다. 섬에 들어와 처음 조상이 되는 사람을 제주에선 '입도조'라 부른다 했다. 사장님은 내게 이 책을 어쩌다 골랐느냐 물으셨고, 나는 사장님에게 입도조시냐 물었다.

 계산을 하고 책방을 나오며 소망을 담은 짧은 이야길 했다. 다음에도 또 오고 싶어요. 그런 날이 곧 올 수 있을까. 밤수지맨드라미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내가 방문할 날이 올까. 그러기엔 내가 너무 바삐 살고 있진 않을까.


-


 제주를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7년 전 제주살이에 큰 도움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다. 잘 지내고 있었느냔 선생님의 질문에 선뜻 명랑하게 대답하진 못했다. 그럭저럭 못 지내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그나마도 정직하겐 그 며칠 사이 휴가를 보내며 풀어진 여유로운 마음 덕에 꺼낼 수 있었던 말이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면 됐지 하셨다. 잘 산다는 게 꼭 대단한 무언갈 이뤄야만 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당신은 잘 살자고 말하기보단 부끄럼 없이 살자고 말한다고 하셨다.

 멋지고 대단한 업적, 거대한 부의 축적, 놀라운 명예쯤 가져야 잘 사는 것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는데, 이 세상엔 늘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무언갈 가지고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무슨 일이든 삶에 닥쳐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라고. 

 좋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산다면, 부끄럼 없이 산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잘 사는 삶이라고.

 다른 사람 아닌 선생님이 해주시는 말이라서 그 말이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선생님은 6년째 매주 외동딸의 재활치료를 위해 섬과 육지를 오가며 생활중이셨다. 그런 선생님의 눈가엔 이전보다 주름이 자글 해졌지만 어딘가 소년 같아 보였다.


 밥을 먹고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해안도로와 바닷가를 구경시켜주실 때, 선생님은 가끔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사람 없는 도로변에 앉아 바다를 십분 이십 분 멍하니 바라만 봐도 마음이 좋아진다고 하셨다. 고독을 누리는 시간이라고.


 공항까지 바래다주신 선생님과 아쉬운 인사를 뒤로 하고, 홀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수속 절차를 밟았다. 한두 시간 지나고 나니 평소 타던 지하철을 타고서 집에 도착했다. 육지는 제주보다 더 바람이 거세고 기온이 낮았고, 가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일단 뛰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