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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Oct 03. 2021

일단 뛰어!

땀 흘리는 사람

후-하-후-하-

숨을 거칠게 내쉬고, 이마에 땀이 그득 맺혔다. 목덜미에도, 등에도, 심지어는 오금에까지.


운동을 하면 좋단 걸 알지만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이유는 땀 때문이었다. 땀 흘리는 것이 싫어서.

그런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별다른 게 없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오래 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 습관 탓인지, 일 년에 한 번은 꼭 크게 병원 신세를 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건강해야 무엇이든, 뭐가 됐든, 일단 '할 수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휘청이기 시작한 지난 3월,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가 요즘 달리기를 한다며 어플 하나를 추천해줬다. 혼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단계별 코치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는 어플이었다. 어플 속 순서를 따라 차근차근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1분 뛰고 2분 걷기를 반복하다가, 회차가 늘어나서 최종적으론 30분을 쉼 없이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빌리'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중고로 만 삼천 원에 구입한 알록달록한 러닝화에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유니콘.


일주일에 세 번. 아무도 없는 밤 시간에 동네 운동장에 나가 달린다. 걸을 때는 상관없지만, 달리다 보면 코 위에 얹어놓은 안경이 거슬린다. 땀 때문에 흘러내리는 것이다. 거추장스러우니 달릴 때는 안경을 손에 쥐고 뛴다. 그러면 눈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희뿌연 어둠. 근시와 난시의 대단한 공조가 이뤄지고 있는 내 눈은, 일 미터 앞의 물체도 분명하게 구분을 못한다. 그저 희미한 형상을 감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 운동장 주위로 듬성듬성 놓여있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달린다. 저 멀리 뿌옇게 보이는 불빛을 기준으로. 한 바퀴, 두 바퀴. 모호한 공기 사이를 달리며,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에겐 시간이 생겼다. 사실은 그래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해졌고, 그래서 달리기를 할 수 있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는 일도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생명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생명을 잃는 것만도 못한 일들을 겪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저 멀리서 그런 소식을 전해 듣고, 안타까워하고, 또 금세 잊고, 다시 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것으로 과연 충분한 걸까, 질문이 떠올랐다.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모래밭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단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다름 아닌 내 마음이었다. 아름다움 한 점 없는 버석버석 거칠어진 내 마음.

무선 이어폰을 따라 귓가에 들리는 빌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웜업을 했다. 운동장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았다. 3분가량의 웜업이 끝나자 본격적인 달리기가 시작됐다. 빌리의 응원을 들으며, 유니콘을 신고 달렸다.


일단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내 안의 지저분한 마음들도 다 달리며 털어버리자.

왼발에 미움, 오른발에 다툼, 다시 왼발에 시기, 다시 오른발에 질투.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콱콱 땅을 밟으며, 박차고 나아가듯 운동장을 달렸다. 내 안에 버리고픈 마음들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발 밑에 던져버렸다. 꾹꾹 밟혀서 조각조각나 사라져 버려라. 다시는 내 마음에 들어오지 말아라.

삼십 분의 시간이 금세 지나가고, 쿨다운을 하며 운동장을 다시 천천히 걸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내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나는 땀 흘리는 것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땀을 흘리면 닦아내고, 몸을 씻고, 잘 말려두었던 옷장 속 깨끗한 옷을 다시 꺼내 입으면 된다. 땀 흘리는 것의 가치를 느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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