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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Feb 09. 2024

중국글자말을 불편하게 여기는 연습

교정교열가는 무엇을 고칠까?

중국글자말(한자말)은 어렵다. 글자 개수며 뜻이 너무 많고, 안 그래도 복잡한데 일제 강점기 뒤에는 일본말과 섞여 들어와 우리 말법을 더 어지럽혀 놓았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중국글자말을 잘 쓰고, 또 그런 사람을 닮으려 하다 보니 어렵게 쓰는 게 버릇이 된 것도 있다. 


이렇게 중국글자말은 오랜 세월 우리 삶에 깊이 파고들었다. 다 가려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같이 글 고치는 사람은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말로 쓰고 말할 때 뜻을 곧바로 알 수 없거나, 낯선 중국글자말을 불편하게 여기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글을 맡긴 사람들이 우리글로 고친 글을 받아봤을 때, 뭔가를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니까. 


처음에는 이런 믿음을 누가 알아줄까 싶었다. 그런데 고친 글을 받고 “감동했다.”, “뭉클하다.”, “내가 하려는 말을 나보다 잘 아는 것 같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옳다는 걸 알았다. 우리글은 순수하고 솔직해서 글쓴이의 생각과 마음, 움직임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중국글자말은 안 그래도 모르겠는 내 속을, 어떤 이론이나 논리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고친 글을 받은 사람들이 마침내 똘똘하고 곧은 우리말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참된 자기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많지는 않지만 서어나무 님의 글에도 중국글자말(한자말)이 섞여 있었다. 이것을 우리말로 고치면 어떻게 될까? 서어나무 님의 생각에 더 가까워지는지, 아니면 멀어지는지 살펴보자. 


● 크고 작은 규모의 기획을 하게 될 때가 많다. 

→ 크고 작은 일을 계획할 때가 많다.


‘규모’는 크기나 틀 따위를 뜻한다. 앞에서 ‘크고 작은’이라 쓴 것과 겹친다. 게다가 ‘규모의 기획’에서 ‘-의’ 쓰임도 알맞지 않다. 이것은 일본글 영향을 받은 탓이다. 우리글은 ‘-의’를 쓰지 않을수록 매끄럽고 뜻이 분명해진다. ‘기획’, ‘계획’은 모두 쓰지만 더 익숙하고 뜻을 알기 쉬운 ‘계획’을 쓰면 좋겠다.


● 내가 인식하는 문제가 주관적인 것은 아닐지

→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게 알고 보니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차라리 ‘인식’, ‘주관’ 두 중국글자(한자)만 놓고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우리말에 함께 쓰니 두 중국글자만 두드러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기 어렵다. 


‘주관적’에서 ‘-적’은 우리글에서 흔히 나타나는 중국글자인데, 유식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막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이상적, 문학적, 미적, 편의적처럼 아무 데나 갖다 붙여서는 안 될 중국글자다. 아무 뜻도 없을 뿐 아니라, 둥글고 부드러운 우리글을 모나게 만드는 ‘-적’이다.


● 결국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입력한 문자를 하나씩 지워 냈다. 그리고 이내 한글문서 자체를 닫아버렸다.

→ 결국 화면에 쓴 글자를 모두 지웠다. 이내 한글 문서도 닫아버렸다.


‘입력’은 ‘쓰다’, ‘넣다’ 같은 말로 바꿔 쓰면 된다. ‘문자’도 되도록이면 ‘글자’라고 고쳐 쓰면 좋겠다. ‘자체’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본바탕을 말하는데, 대부분 안 써도 말이 된다. 


중국글자는 그렇다 치고 남의 글을 너무 멋대로 고친 거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둘러대자면 여기에 쓰지는 않았지만 위 글월의 앞뒤 내용은 꽤 길고 자세했다. 그래서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거나 문자를 하나씩 지우는 모습까지 살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책과 영화에 대한 감상나누기 활동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 책과 영화를 보고 이야기한 활동을 핑계 삼았다.


‘감상’을 검색해 보면 뜻만 네 가지다. 물론, 앞뒤 내용으로 보아 뜻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위 글월은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킬만한 깊은 내용이 아니다. 읽는 사람의 눈길을 오래 붙잡아둘 까닭이 없다. 상황이나 행동을 설명하는 글은 쉽게 읽히게 쓰면 그만이다. 


‘명분’을 고쳐야 하는 까닭도 간단하다. ‘명분’을 설명해 보라. 얼른 말이 튀어나오지 않고, ‘구실’이니 ‘실리’니 하는 또 다른 중국글자를 꺼내 설명하게 된다.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분’보다는 ‘까닭’이라 쓰면 잘 와닿는다. 그러나 위 글월에는 ‘핑계’가 더 알맞겠다. 


● 주인공 노든에 이입을 했다.

→ 주인공 노든에게 깊이 빠졌다.


‘이입’은 말을 해보면 ‘의의(뜻)’처럼 겹말 소리가 난다. 말하기 어려운 건 글로 옮겨 써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중국글자말에서 나타난다.  


● 개인이 갖고 있는 문제인식을 시작으로 내가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현방법, 즉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 내가 가진 문제를 스스로 알고 해결하는 방법도 함께 고민한다.


‘문제인식’, ‘정의’, ‘구현방법’ 같은 중국글자말은 뜻을 얼른 알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그다음에 알기 쉬운 말을 덧붙인다. 그러면 으레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구현방법’, ‘아이디어’, ‘고민’은 모양만 다르지 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꼴이다. 구현방법을 써놓고는 못 미더워 아이디어를 쓰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고민까지 쓴 것이다. 읽는 사람이 이해를 못 할까 봐 걱정된다면, 쉬운 우리말로 쓰면 좋겠다.


중국글자를 쓰지 않으면 글월(문장)이 너무 길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위에 본보기를 보면 오히려 줄었다. 아래 글월도 마찬가지다.


● 아름다운재단에서는 기획에는 ‘무엇을 하는지’보단 ‘왜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본질에 대한 고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 ‘아름다운재단’에서는 기획 단계에서 ‘무엇’을 하는지보다 ‘왜’ 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본바탕에 대한 고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글자말은 뭐니 뭐니 해도 논문글에서 많이 나타난다. 다음번 글에는 여기저기 논문에서 중국글자말을 찾아 우리말로 바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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