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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좀 잡아줄래요?

순이책방과의 인연

by 에뜨랑제

지난겨울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핸드폰으로 딩드롱 하고 알람 소리가 울렸다.

예전에 원예 교실에서 맺은 인연으로 카페에 가입해 선생님과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전주의 한 대학교에서 꽃꽂이 발표회를 하신다는 소식을 인터넷 카페에 올리신 것이다. 멀지 않은 과거인 코로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유일하게 마스크를 쓰고 취미활동을 했던 게 바로 원예교실이었다. 나 또한, 오래전부터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우고 있었던 중이어서인지 전문가에게서 배우는 원예기술은 매우 흥미진진했고 더욱더 가드닝에 애착이 갔다. 그러니 오랜만에 선생님 얼굴도 뵙고, 또 카페 공지를 보니 행사에서 꽃다발 만들기 실습도 할 수 있다고 해 겸사겸사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달력에 표시해 놓은 그날이 다가왔다. 전주에 20년 이상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은 가보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행사를 하는 거라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목적지를 찾았다. 막상 도착해서도 행사장을 찾지 못해 이 건물 저 건물로 헤매고 다니는 통에 시간도 조금 지체되었다. 그렇게 행사장을 겨우 찾았고, 마침내 선생님을 만나 반갑게 축하 인사를 드렸다. 행사장에는 작가의 주제를 표현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꽤 많았다. 이래저래 마음에 드는 작품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꽃 향기를 맡기도 하는 등 여유 있게 행사를 즐겼다. 복도 끝에 있는 작품까지 꼼꼼히 보며 팸플릿도 찾아보던 중 이제 집에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의 옷자락을 살짝 잡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 나 손 좀 잡아줄래요?"

"네?"

"아, 저기로 내가 좀 내려가야 하는데, 잠깐 손 좀 잡아주세요."

"아, 네."


그녀는 복도 끝에 있는 또 다른 출입문으로 나가려는 방문객이었다. 내가 살짝 손을 잡아드리자 나에게 온전히 의지해 힘을 주고 계단을 내려가셨다. 잠깐의 순간이었는데도 폭신하면서도 아담한 그녀의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살짝 뒤뚱뒤뚱 걷는 뒷모습에 총총히 걸어가는 발걸음도 인상 깊었다. 그 짧은 순간의 스침에도 그녀가 왠지 매우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원래 있는지, 아니면 추운 날씨에 갑자기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건지, 그냥 나를 스치는 사람들 중에서 포근히 안기고 싶은 느낌이 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시간은 흘러가고, 봄을 지나 초여름이 다가왔다. 식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시절이다. 풍족한 햇볕에 습도까지 보태져 마치 자연 온실을 방불케 하는 날씨 아닌가. 베란다의 작은 화단도 생기를 찾고, 아파트 단지 내 정원에서도 활기찬 움직임이 감지된다. 새소리마저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다.


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인터넷 원예 교실 카페에서의 온 알람이다. 순이책방이라는 곳에서 마련한 작은 행사가 있으니 참석하면 좋겠다는 소식이다. 이어 선생님은 아쉽게도 또 다른 수업이 있어 참석이 어렵다는 공지였다. 나는 원예 카페에서 소식이 오면 관심이 가고 웬만하면 참석하려고 한다. 왠지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통 관심사도 비슷한 것 같고, 뭔가 무해한 느낌이 든다. 요즘 세태의 화두가 무해함이라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데, 그런 편안함을 원하는 마음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사일이 되어 서서학동에 있는 순이책방으로 네비를 찍고 길을 나섰다. 내가 최근 차가 있어 좋다고 느끼는 게 낯선 곳을 내가 운전해서 찾아갈 수 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 코스는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는 서학동 예술 마을 도서관 인근이라서 그리 낯선 길은 아니었다. 골목길을 천천히 올라 길 옆에 있는 작은 서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바라본 서점의 첫인상은 포근함이 느껴지는 동네 책방이라는 것. 그곳은 아담한 크기의 목조건물이었는데, 더위가 시작된 날씨임에도 실내는 바람이 들어와 시원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바로 작가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사님은 예쁜 식물 그림이 있는 에세이를 쓴 마을 작가 분이었는데, 자신의 글과 관련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셨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강의에 이어 특별 공연으로 오보에 솔로 연주가 있었다. 체격이 있으신 젊은 분이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추어 연주가인 것 같았다. 그렇게 연주는 시작되었다. 살짝 긴장한 듯한 연주자의 표정을 보며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심코 첫 음이 연주되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눈물샘이 차올랐다. 그리 능숙하지 않은 그의 연주 소리에 예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음악 애호가로 색소폰, 클라리넷을 독학으로 배우시고 교회에서 간간히 가스펠 송과 찬송가를 연주하시고는 했다. 그때 나는 항상 아빠가 연주를 하시면 고개를 숙이고 제대로 못 쳐다봤었다. 가족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인데 자칫 아빠가 연주를 하시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차에 갑자기 이 연주자가 실수로 삑사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좁은 공간이어서인지 당황한 듯한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다시 침착하게 연주를 이어갔고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한 곡 연주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클라리넷을 연주하셨는데, 그 모습이 생각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분은 자신이 긴장을 했고 첫 곡이 준비를 제대로 못한 곡이라서 실수가 많았다고 시인하며, 다음 곡은 자신 있는 곡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그 곡은 바로 넬라 판타지아. 원곡은 ‘가브리엘의 오보에’ 영화 <미션>의 삽입곡이다. 이번에는 연주자가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한 곡이었는지 실수 없이 매끄럽게 연주를 했다. 공연은 마무리되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자신이 오늘 초청을 받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원래 오셔야 할 분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 자신이 대신 오게 되었다고 했다. 또, 준비 없이 대중 앞에서 한 연주는 처음이라 매우 긴장했지만 관객들의 호응에 힘을 얻어 앞으로 악기연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마을의 작은 연주회에서 느낀 감동과 함께 내 머릿속에는 아빠의 가스펠 송이 퍼지고 있었다.


‘통통통통통통통 배 떠나간다. 믿음 소망 사랑 싣고 배 떠 나간다.’


이어지는 행사 순서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 시간도 있었다. 색연필을 활용한 식물 그림이었는데, 작가님은 파버 카스텔 수채 색연필 전문가용 120색을 준비해 왔다며 이것만 있으면 어떤 그림도 근사하게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 색연필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보며 그 선명한 색채 하나하나에 눈이 갔다. 그러면서, 최근 취미로 시작한 그림 그리기를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목소리와 뒤태가 익숙한 사람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하고 기억을 더듬자 드디어 생각이 났다. 나는 그분께 작년 겨울 김진희 선생님 꽃꽂이 발표회에 가시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맞다고 하시면서 본인도 선생님의 원예 수업을 받은 제자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 혹시 전시장 복도 출입구에서 계단 내려갈 때 손 좀 잡아달라고 하셔서 제가 잡아드린 사람인데 기억이 나시는지를 또 여쭤보았다. 그리고 한 5분쯤 되었을까?


"아, 그래 맞아요. 기억났다. 내가 그때 손 좀 잡아달라고 부탁했었어. 내가 젊을 때는 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이제 해요."


그리고.... 그분을 다시 보니, 다리가 약간 불편하신 것도 같았다.


"아, 맞죠? 기억나시는구나. 그때 잡아드렸던 손 촉감이 생각나요. 그런데, 이 책방 이름이 예뻐요. 순이책방. 이름이 왜 순이 책방이에요?"

"내가 이 책방 주인이거든, 내 이름이 순이예요."

"아, 그러세요? 사장님이셨구나. 순이책방, 이름이 너무 예뻐요."

"나는 내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어렸을 때부터 싫었는데, 막상 책방을 열려고 하니 다들 내 이름을 추천하더라고. 그래서 순이책방이 된 거라우."


하하 이런 인연이.

갑자기 가슴이 찡해왔다. 그때 그분의 손을 잡으며 느꼈던 감정이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순이책방 이름이 좋다며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즐거워하신다. 나도 그분들과 같이 있으니 덩달아 즐거웠다.


그래,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면 된다.

지금 내 주방 냉장고 문에는 순이책방 마그넷이 부착되어 있다. 사장님께서 그날 주신 선물이다. 책방에 들른 한 초등학생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거라고 하셨다. 추억과 인연을 선물해 준 순이님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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