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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blue Mar 20. 2018

세계가 부서질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아이사와 리쿠>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누구나 '나잇값'이란 걸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나이가 늘어갈수록 이 값의 무게도 더 무거워져서 세상에는 제값을 하지 못한 수많은 ‘어른아이’가 있다. 그런데 반대로 아주 어려서부터 어른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나잇값을 하고 있는 이들.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17살 이후부터는 삶의 요령만 늘었지, 정신적인 성숙은 이미 그 전에 끝났다고 하는 이들도 태반이다. 그렇다면 어른으로의 성장이란 건 몸도 정신도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가 견고해지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성장이 반드시 ‘진화’나 ‘더 나은 것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호시 요리코의 <아이사와 리쿠>의 주인공인 17살 리쿠는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어버리느라 솔직함을 잊어버린 소녀다. 타인의 슬픔이나 사랑, 웃음에 흥미나 동질감도 느끼지 못한다. 리쿠 자신도 그것이 꽤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본인이 혹여 ‘괴물’은 아닐까 의심한다. 그래서 때때로 아무 의미도 없는 눈물을 흘린다. 슬프거나 혹은 아프지 않은데도 울어야 할 상황 같으면 울어버린다. 그렇게 자신이 괴물이 아님을, 어른들의 역겨운 이면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아이임을 연기한다. 


미남 아빠와 완벽한 엄마를 가진 17살의 아름다운 소녀 리쿠. 그녀는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리쿠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녀의 부모에게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완벽해보이지만, 아빠는 바람이 났고 엄마는 타인은 물론 자신의 감정에까지 서툴면서 자신의 방식이나 감정을 강요한다. 하지만 대충 가려놓으면 아이의 눈에는 결점이 보이지 않을 거라 믿는다. 유기농 채소만을 먹이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게끔 하고 언제나 청결을 유지하게끔 교육하는 것이 양육의 최선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이, 아이는 자신과 다르게 자란 이들을 역겹거나 불결하게 생각하는 어른의 편협함을 먼저 배워버렸다. ‘간사이는 이상한 곳’이라는 엄마의 말에 따라 리쿠 또한 간사이는 매우 이상한 곳이라 생각하게 된 것처럼. 


그런데 리쿠의 엄마가 불현듯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라며 리쿠를 간사이의 친척집에 보내버린다. 말은 교육의 차원이지만 실은 도통 자신의 말에 뚱했던 아이에 대한 복수이자 징벌이다. 


시끄럽고 불결하다고 여기는 간사이에서 리쿠는 스스로 고립되기를 원한다


리쿠에게 간사이는 엄마의 말처럼 이상하고 불결한 세계다. 간사이는 타인에게 너무나 관심이 많으며, 그녀에게는 귀여운지도 모르겠는 애완동물을 만지고 나서 손도 닦지 않는 곳이다. 그녀가 간사이를 버티는 힘은 그곳의 모든 것과 자신이 100미터 쯤 떨어져있다고 믿으면서 벽을 치는 것뿐이다. 나에게 들어올 틈도 내가 다가갈 여지도 차단한 채 스스로 고립된 리쿠는, 이를테면 간사이에서 다니는 학교의 교복을 입지 않는 것으로 자신이 세운 벽을 표출한다. 


리쿠의 사촌동생인 도키오는 몸이 약해 앞날이 불투명한 아이지만, 특유의 밝음을 무기로 리쿠에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리쿠는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조금씩 그곳에 편입되어 간다. 이유 없이 자신이 좋다고 따라다니는 어린 사촌동생 도키오나 리쿠의 눈물을 의심하는 선생님 등 도통 자신이 속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과는 다르게 솔직한 사람들에게 흔들린다. 마침내 어린 도키오가 생사를 건 수술을 마치고 살아남아 리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리쿠의 견고한 세계는 완벽히 무너져 버린다. 한 순간 북 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항구로 달려 나가 리쿠는 엉엉 운다. 자신을 바라보는 어른들이 안심하게끔 아이를 연기하며 흘리던 눈물과는 다르다.


아내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아빠나, 완벽한 척 무장하고 있지만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무지한 엄마처럼, 리쿠는 어른 같아서 솔직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고 재단했던 ‘어른스러웠던’ 리쿠는 간사이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아이가 이제야 아이다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리쿠는 이제야 진짜 자신의 세계를 쌓아올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은 괴물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 거짓의 상징인 눈물로. 


목숨을 건 대수술에서 살아남은 도키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리쿠에게 전화를 건다 도키오의 전화를 받은 리쿠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감지한다


<아이사와 리쿠>는 어른들의 이면에 너무 빨리 물들어 버린 소녀가 겪는 균열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언제 파동이 일기 시작했는지 내내 놓치지 않다가 그녀의 세계가 완전히 깨어져버리는 순간에 주목한다. 전부라고 생각했던, 견고한 성이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깨어질 때의 잔혹과 좌절 하지만 그로인해 다른 길이 열리는 순간이 아무도 없는 항구에서 터져 나오는 리쿠의 울음 사이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 함께 마음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며 동시에 기쁘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자라야 하는 혹은 자라기를 멈춰서 두려운 모두에게 리쿠의 울음은 각개의 의미로 다가온다. 사춘기 소녀가 다른 세상의 다정함을 통해 성장통을 이겨낸다는 통속이 이토록 묵직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호시 요리코의 <아이사와 리쿠>는 2015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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