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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성 May 05. 2020

왜 유튜브 안 해요?

못하는 것, 안 하는 것, 하고 있는 것... 내 속도로 살아가기


전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합니다. 주로 온라인 콘텐츠를 기획해서 글을 쓰고 영상도 만들어요. 필요하면 이미지도 만들지만 디자이너는 아닙니다. (이건 확실)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웃풋이 영상이다 보니 영상 콘텐츠가 필요한 조직에서 영상을 중심으로 크리에이티브를 연출하거나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유통 채널을 관리/운영하는데요.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정말 많이 듣는 얘기가 있어요.


왜 유튜브 안 해요?


답하기 너무 난감한 질문이에요.



유튜브가 일


안물안궁이지만 서론부터 제가 하는 일을 자세히 쓴 이유는 유튜브가 제 일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전 유튜브를 안 하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유튜버가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죠. 내 얼굴이 나오지 않아도, 내 얘기를 직접 하지 않아도 제가 만든 영상 콘텐츠 수백 개가 유튜브에 있답니다.


그치만 결국 제 것이 아니지 않냐고요? 비록 퇴사와 동시에 모든 걸 두고 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유튜브는 데이터가 남아요. 내가 만들었던 콘텐츠의 조회수, 댓글 수 등과 반응을 종종 다시 확인하는데요. 당시엔 조회수가 낮았던 콘텐츠가 뒤늦게 터진 경우도 있고 꾸준히 보는 사람들이 있는 콘텐츠의 최신 댓글을 보며 피드백을 체크하기도 해요. 내 손을 떠난 자식이 잘 크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마음으로요. 지금 회사에서도 열심히 유튜브 밭에 씨를 뿌리고 있어요.


회사 일로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굳이 꼭 더 해야 할 필요를 못 느껴요. 또 지금은 퇴근해서까지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싶지 않고요. 품이 많이 드는 일이란 걸 잘 알아서 그렇죠.

전 직장 채널에 마지막으로 업로드한 영상이네요


너무 잘 알아서 못해요


결혼과 출산은 모르고 하는 거라잖아요. 유튜브도 비슷한 것 같아요.


영상 제작 과정에 얼마나 공수가 드는지 너무 잘 아니까 쉽게 시작을 못하는 것이기도 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냥 찍어서 잘라 붙이고 대충 자막 몇 개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해요. 그저 웃어넘깁니다. ^^


지금은 필요를 못 느끼지만 유튜브를 시작한다면 대충 하고 싶진 않아요. 아무래도 커리어와 직결된 부분이기도 하니 조금이라도 기획 방향성과 형식 틀을 잡고 시작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품이 드는데 전 지금 3살, 6살 두 아이를 키우며 9to6 풀타임으로 일하기 때문에 시간과 체력,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내가 필요를 못 느끼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 더 시간을 쏟고 싶기도 해요.

육아휴직 중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였는데 밤새 영혼 갈아 넣고 앉아있던... 대충이 안되는 나란 녀자. 혼자 하다 숨넘어가서 포기.

유튜브보다 하고 싶은 일


유튜브만 안 할 뿐이지 다른 건 다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웹진 <마더티브>를 사이드 프로젝트로 하면서 글도 쓰고 브런치, 인스타그램 등 SNS 채널과 온라인 문화살롱도 운영하고... 없는 시간 쪼개 퇴근 후에도, 휴일에도 알차게 시간 보내고 있어요. 지금은 이런 것들이 유튜브보다 더 하고 싶은 것들이에요. 나를 채울 수 있는 일들이죠.


모든 일을 글로 시작하는데요. 짧더라도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내용을 구성해서 일을 진행해나가거든요. 요즘 삶이 복잡해서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가장 강해요. 그래서 다시 글을 꾸준히 쓰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시작의 준비 단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묻는 유튜브는 온전히 내 이야기를 담는 콘텐츠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도 정리 단계는 필요하니까 유튜브 시작을 준비하는 단계이려나요. 갑자기 짠! 유튜브 채널 열었어요~ 하고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에요.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새로운 시작이 뭐가 될지도 정리해봐야겠네요.



하고 있어요


전 약도 없다는 낯가리는 관종에 완벽주의 기질도 있어요. 뭔가 계속하는데 부끄럽고 부족함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몰래하죠. 사람들이 잘 안 쓰는 SNS를 이용한다든가, 콘텐츠 실험을 할 수 있는 비밀 계정을 운영하기도 해요. (갑분고백)


거기에 두 아이 육아로 시간과 체력,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시도하는 것들의 규모가 자꾸 더 작아져요. 이전만큼 못한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화도 났는데 지금은 많이 내려놨어요. 작게 하나씩 일궈나가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다면 눈에 띄는 큰 것부터 시작해도 좋겠지만 전 그럴 성향도 상황도 아닌 거죠. 그렇지만 살다 보면 모든 일들이 다 연결 되더라고요. '아, 내가 이걸 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싶은 일들이 있어요. 지금 쓰는 작은 글을 나중에 유튜브 영상에서 떠들고 있을 수도 있는 거죠.


그저 손 놓고 안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못 하는 이유를 찾고 차근차근 천천히, 조금씩 준비하며 나아가고 있어요. 말하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엔  계획이 있답니다.


쓰다 보니 제게 왜 유튜브를 하지 않냐고 물어봐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요. 덕분에 나는 시작도 안 하는 사람이라고, 못 하는 이유만 찾는 사람이라고 자책하다 ‘정말 그런 사람일까?’ 자문하고 내가 무언가 계속하고 있다는 걸,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또 이 글을 쓰면서 유튜브를 시작해야 할 이유와 기획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거 해볼까, 저거 해볼까 흘리는 아이디어는 많았는데 온전히 나를 담아낼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유튜브 콘텐츠가 생겼어요.



인생은 타이밍


그렇지만 바로 시작하진 않을 거예요. 여러 가지 늘어놓았지만 결정적인 이유,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이죠.


두 아이 엄마가 된 후 여유가 없어지고 조급해지면서 급히 먹은 밥이 체했던 경험이 최근 많아요. 타이밍을 재고 따져야 하는 삶이란 걸 깨달았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한 번에 무리하고 전력 질주하던 때랑은 다른 속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요.


현재 파이형 에너지 그래프엔 자리가 없으니 제 인생 타임라인 그래프 어디쯤에 ‘유튜브 시작’이라는 점을 찍을 생각이에요. 그때까진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준비해나갈 거고요.


주변에 뭔가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웃풋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 뭔가 할 법한데 안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물어봐주세요. 왜 안 하냐고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냐고, 조용하고 작지만 하나씩 일구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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